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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는소설책추천3

03. “아침부터 정원을 돌아다녔어요.” 저녁 무렵, 어머니와 응접실에서 차를 마시며 정원 쪽을 바라보는데, 세 번째 돌계단에 오늘 아침 그 뱀이 다시 스르르 나타났다. 어머니도 뱀을 발견하고, “저 뱀은?” 하며 일어나 내게로 달려오시더니 내 손을 꼭 잡고 서서 꼼짝도 하지 않으셨다. 그 말에 나도 문득 짚이는 바가 있어, “알의 어미?” 하고 입에 올리고 말았다. “그래, 맞아.” 어머니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우리는 손을 맞잡고 숨죽인 채 잠자코 그 뱀을 지켜보았다. 돌 위에 구슬프게 웅크리고 있던 뱀은 비틀비틀 다시 움직이는가 싶더니, 힘없이 돌계단을 가로질러 제비붓꽃 쪽으로 기어들어 갔다. “아침부터 정원을 돌아다녔어요.” 내가 작은 소리로 말하자, 어머니는 한숨을 내쉬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시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그래.. 2022. 6. 19.
02. 다스 게마이네_바바가 편지를 보내왔다. 1. 환등(幻燈) 아아, 말하다 보니 무심코 이실직고해버렸다. 결국, 그 무렵의 나는 아까도 잠깐 말했듯이 금붕어 똥처럼 의지력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는 생활을 했다. 금붕어가 헤엄치면 나도 쫄래쫄래 따라가는 똥처럼 바바와의 만남을 허무하게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팔십팔야(● 八十八夜. 입춘일로부터 88일째 되는 밤.)였다. 이상하리만치 바바는 달력에 꽤 민감해서, 오늘은 경신년의 불멸일(●佛滅日. 부처도 멸할 정도로 매우 불길한 날.)이라며 풀이 죽어 있는 날이 있다가도, 오늘은 단옷날이니 어둠 축제(● 등불을 끄고 제례를 지내는 축제.)라는 둥,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중얼거렸다. 그날도 나는 우에노 공원의 단술집에서 새끼 밴 고양이, 벚나무, 꽃보라, 송충이, 그런 풍경이 자아내는 .. 2022. 6. 7.
07. 가장 힘든 건, 스스로 찾아온 사람만 도와줄 수 있다는 것 “맥스.” 에릭은 자판기 앞에 멍하니 서 있는 맥스에게 다가갔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이 유리창에 비쳤다. 맥스가 돌아섰다. “어떻게 됐죠? 할머니를 도와주실 수 있겠어요? 할머니의 기분이 나아질 만한 처방을 해주셨나요?” “할머니가 우울증에 걸렸다고 생각하는 건 알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아.” “어째서요?” “진찰을 해본 결과, 네 할머니는 이런 상황임에도 아무런 이상이 없어. 특별한 분이시지…….” “그럼 영양 보급관은요?” 맥스가 항의가 아닌 애원하는 듯한 눈으로 물었다. “우울증이 아니라면 어째서 영양 보급관을 거부하시는 거죠? 그걸 달지 않겠다는 건 자살이나 마찬가지잖아요. 죽어도 상관없다고 말하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비이성적인 선택이라고만 할 수는 없단다, 맥스. 할머니와 같은 처지에.. 2022. 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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