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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세이/<동경인연>6

05. 사진가의 사죄 행복하지 않았다. 아무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순도 100퍼센트, 무균의 공간에서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을 탐구해보고자 했는데, 막상 도쿄의 오치아이 방에 자리를 잡자, 편의점에서 고른 아이스크림을 코앞에 대고 ‘이것은 나쁜 걸까’ 하고 급히 엔을 환전해 보고는 가격이 비싼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이 마치 새벽부터 밤까지 일하는 엄마의 수면시간을 빼앗는 것처럼 불편하기만 했다. 피하지 못하던 자기 검열이 바다를 건너까지 따라올 줄은 몰랐다. 그랬다. 도쿄에서 문화적 자극으로 긴장은 하면서도 대부분 행복했지만, 어째서인지 『죄와 벌』의 마르멜라도프처럼 한번 죽어본 심정으로 우울한 자신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깨알 같은 걱정이 나의 고단한 이마에 새겨.. 2022. 3. 12.
04. 우체국의 마리 아줌마 동화작가의 영혼을 가진 우체국 아줌마와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에는 여러 버전이 준비되어 있다. 왜냐하면 아줌마와 나는 이야기를 재구성하고 편집하는 능력을 즐기기 때문이다. 마치 하루종일 노래하는 새처럼 우리는 서로의 머리 위로 말풍선이 떠다닌다는 걸 첫눈에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우체국 아줌마는 시간여행자로서 미래의 내가 현재의 나를 만나러 온 것 같았다. 우리는 마주 본다. 그리고 정해진 대사를 정해진 순서에 따라 말한다. 마치 운명처럼. “80엔입니다.” 우체국 아줌마가 창구에서 국제우편에 도장을 찍으면서 말한다. 내가 동전을 세어서 건네주자 우체국 아줌마가 누구에게 그렇게 편지를 쓰는가 묻는다. “가족과 친구들이요.” 어느 날인가 한국으로 보낼 편지를 들고 오치아이 우체국 창구에 줄을 서 있자 우체.. 2022. 3. 12.
03. 마지막 기억 새벽에 메모해 둔 종이에서 나는 소리는 좀 특별한 데가 있다. 나는 오랫동안 잠들어 있다가 지금 막 깨어났다. 마침내 헌책방 아저씨와의 마지막 만남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국제전화를 끝으로 아저씨와 마지막 대화가 될 뻔했으나 나는 아저씨와의 만남을 그런 식으로 끝맺을 수는 없었다. 그해 나는 자비로 도쿄도서전에 갔다. 비행기표 예매를 하는 동시에 오치아이의 주인집 아줌마에게 빈방이 있으면 며칠 빌리고 싶다는 내용의 국제전화를 걸었다. 아줌마는 반가워하면서(내가 만든 김치를 좋아했다) 내가 살던 방은 다른 사람이 세 들어 살고 있으니 1층 아들 방을 쓰라고 했다. 마침내 아저씨를 만나러 나카이 역에 내렸다. 아저씨는 많이 야위어 있었고, 역시 말수도 적었지만, 기뻐했다. 아저씨는 나에게 들고나온 걸 전해주었.. 2022. 3. 11.
02. 오치아이의 방 방 하나를 소유한다는 것, 그것도 이국에서 자신의 몸을 눕힐 방 하나를 가진다는 건 생각했던 것보다 쉬웠다. 그것은 까다로운 일본의 부동산 문화 때문이었다. 계약 기간이 만료되기 전에 이사를 가고 싶었던 오치아이의 방 세입자가 집주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나와 새 계약서를 썼다. 나는 4조반의 다다미방을 얻기 위해 선불 월세 2만9천 엔과 보증금 2만9천 엔, 그리고 방을 빌려주어서 감사하다는 명목의 ‘레이킹’으로 5만8천 엔을 지불했다. 엔화 환율을 100엔 기준 1000원으로 했을 때 약 120만 원 정도를 가지고 방을 얻는 데까지는 좋았으나, 그 방에서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벗어날 수는 없었다. 눈을 감으면 오치아이의 네모난 방 하나가 떠오른다. 다다미 4조반의 공간에 한국에서 가져온 솜이불 한 채가 .. 2022. 3. 10.
01. 헌책방 시바타 아저씨 헌책방 아저씨는 낡은 다다미방에서 개 한 마리와 생활했다. 아저씨는 늘 술에 취해 있었다. 작은 헌책방 안은 정리가 안 된 책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고, 가끔 가격을 물으며 아저씨를 바라볼 때면 장사에는 통 관심이 없다는 얼굴로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지금 생각하면 책 뒤에 연필로 가격이 적혀 있었는데 나는 왜 몰랐을까. 아니면 적혀 있지 않은 책도 있었던 걸까. 니혼대학 예술학부 청강생 시험을 통과하고 6개월 만에 어학원을 졸업한 나는 대학에서 청강하고 있는 다섯 과목을 듣는 것 이외에는 아무 할 일이 없었다. 하루종일 말 한마디 안 할 정도로 고독한 시간. 이어령 선생님의 『축소지향의 일본인』 일본어판을 서점에서 산 것도 그때 즈음이었다(이 책은 시미즈 선생님이 빌려 가서 내가 귀국한 후에야 돌려주었.. 2022. 3. 8.
00. <동경인연> 연재 예고 동경인연(東京因緣)에 대하여 우리는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의미를 깨닫는다. 그 시절 그곳 그 인연은 그저 추억의 한 자락으로 소모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완성해주는 퍼즐의 마지막 한 조각이 되기도 한다. 일본문학 번역가이자 에세이스트인 이은주는 『나는 신들의 요양보호사입니다』와 『오래 울었으니까 힘들 거야』에 이은 세 번째 에세이 『동경인연』에서 삶의 큰 강을 건널 용기를 주었던 젊은 날의 한 페이지를 열어 보인다. 그 속에는 문학이 있었고, 열정과 우정이 있었고, 배려와 사랑이, 사람들이 있었다. 이은주의 청춘의 키워드는 문학과 일본이었다. 넉넉지 않은 가정형편에도 주저앉지 않고 도전정신으로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동경의 오치아이 4조반 다다미방을 거처로 삼고, 일본대학 예술학부 문예학과에서 문.. 2022.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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