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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세이/<바람이 되어서라도 한 번만>6

05. 비늘구름 뜨는 오후 (마지막 회) 엄마, 잘 지내고 있죠?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할머니랑 이모 만나 방방곡곡 여행 다니시느라 정신이 없겠어요. 언니들 만나서 엄마 계시는 곳에 갔더니 안 계시는지 “아이고, 우리 딸내미들 왔나?” 한마디 말이 없더군요. 그래도 우린 섭섭하지 않아요. 엄마가 놀러 갔다고 여기니까요. 엄마, 탁 트인 하늘 보니 속이 시원하지요? 생전에 아들 없어 말도 못 하시고, 울산 이모 묘를 그렇게 부러워하시는 모습에 참, 마음이 무거웠어요. 말로는 한 줌의 재로 만들어 흔적도 없이 새 모이가 되게 뿌려 달라고 하더니, 말씀하셨으면 될 걸 혼자 속앓이를 한 것 같아 마음이 아팠어요. 엄마가 아주 좋지 않을 때 엄마 갈 곳도 정해 뒀다는 말에 내 집도 마련해 뒀냐며 그리 반갑게 웃으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마음에 드셨.. 2022. 7. 19.
04. D라인의 여유 온천천을 걸었다. 사람들이 갑자기 내리는 비 때문인지 모두 종종걸음으로 바쁘게 움직였다. 나는 그들 속에 스며들지 않고 천천히 걸었다. 걷다 물고기가 있으면 한참 동안 멍하니 보기도 하고, 한가로이 서 있는 왜가리의 눈길을 따라 그곳에 머무르기도 하며 시간 속을 걸었다. 한참을 걷다 아름다운 광경에 미소까지 머금고 눈길을 빼앗겼다.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유모차를 밀며 걷는 젊은 엄마였다. 비가 내려도 개의치 않는 여유로운 걸음이었다. 나도 유모차와 속도를 맞추며 한참을 따라갔다. 아기 엄마가 휙 뒤를 돌아보았다. “아이고, 놀랬죠? 너무 아름다운 모습이라 저기서부터 뒤따라왔어요.” 겸연쩍어 나도 모르게 슬그머니 우산을 받쳐주며 상황을 설명했다. “에고, 비가 와서 어쩌노. 아기가 놀라겠어요.” 유모차 안을.. 2022. 7. 18.
03. 반피와 반피가 만나면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내비게이션에서 낭랑한 목소리로 길을 잘못 들어섰다고 말해준다. 분명 목적지가 코앞이었는데 잠깐 사이에 스쳐 지나가고 말았다. 가끔 있는 일이라 당황하는 기색조차 없다. “남의 동네 왔으면 한 번쯤은 헤매 주는 것이 예의다, 예의. 내 말이 맞나? 아이가?” 남편의 천연덕스러움에 할 말이 없다. “아, 예에. 맞습니다. 맞고요. 어련하시겠습니까.” 조금은 비꼬는 투로 답하고는 웃어넘긴다. 정말 우리는 답이 없다. 길을 몰라서도 헤매고, 둘이서 이야기하다 길을 놓치기도 한다. 아는 길도 그러기 일쑤니 우리는 남보다 30분 정도는 일찍 움직여야 한다. 그래야 약속 시간을 얼추 맞추어 갈 수 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면 친구들은 어서 오라는 인사보다 길을 헤매고 오지 않았는지를 먼저 .. 2022. 7. 16.
02. 사랑의 티켓 엉덩이가 들썩인다. 어깨도 덩달아 으쓱거리고 코 평수가 늘어난다. 평소에 잘 쓰지 않았던 성대가 조금씩 열리고 소리가 새어 나온다. 듣기만 하던 노래가 내 목에서 나오고 있다. 잔잔하고 때로는 흥겨운 소리다. 몇 번이고 아는 부분만 흥얼거리며 무한 재생을 하는 고장 난 테이프 같다. 고운 소리는 아니지만 나름 신이 난 소리에 집안 분위기가 밝아진 것은 사실이다. 사실 난 트로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남편이 운행 중에 신나는 트로트를 틀면 나도 모르게 짜증 섞인 목소리로 시끄럽다며 구박을 주기도 했다. 그런 내가 요즘엔 트로트에 푹 빠져있다. 젊은이들이 부르는 노래는 에너지가 담겨 있어 나를 끌어올려 주는 느낌이다. 한껏 밝아진 그들의 목소리로 전하는 노래 가사는 추억과 지나온 삶이 밝게 그려져 좋다... 2022. 7. 15.
01. 사랑의 온도 36.5도 12시 10분. 오늘도 어김없이 휴대폰이 울렸다. 보지 않아도 누군지 안다. 받을까 말까 잠시 망설이다 받았다. “밥은 먹었나? 난 국수 먹었다. 뭐 물 꺼고? 어여 먹어라.” 쩝쩝거리며 하는 말이다. 남편이다. 목소리에 힘이 없어 보였다. 아침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조금 걱정이 되었다. 일주일 정도 출장을 가야 한단다. 순간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 들뜬 목소리가 탄로 날까 봐 깊이 숨을 한 번 쉬며 “하는 수 없지 않으냐”고 위로 아닌 위로를 했다. 혼자 있기 싫어 투덜거리던 내가 남편을 위로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이젠 혼자의 시간을 차츰 즐겨보려 한다. 언제나 함께 움직여 왔기에 홀로 서는 연습이 필요하다. 오후 비행기로 출장길에 오른 남편을 배웅하고 오는 길에 먼저 친구들에게 .. 2022. 7. 14.
00. <바람이 되어서라도 한 번만> 연재 예고 엄마의 몸이 한 줌의 재가 되어 자연으로 돌아가 버린 지 4년, 혼자 억누르던 이야기들을 세상으로 날려 보낸다 프롤로그 새가 노래한다 편안하다. 가슴 깊이 숨겨두었던 이야기가 세상 밖으로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혼자 오십 년을 넘게 그것들을 꼼짝 못하게 억누르고 있었다. 스멀스멀 고개를 들기라도 하는 날이면 왈칵 쏟아지는 눈물에 풀이 꺾여 다시 숨어버린 이야기들. 이제 가볍고 아름다운 날개를 달아 밝은 세상으로 날려 보내려 한다. 언제나처럼 따라다니던 엄마의 삶 그리고 그 일부가 되어버린 내 삶. 영원히 내 곁에 있을 것 같던 엄마가 아주 먼 길을 떠나고, 이젠 가끔 이기적인 삶을 살아가려 한다. 내 어깨를 두 팔로 살포시 보듬고 조용히 속삭여준다. 수고했다고, 이제 다 지난 .. 2022. 7.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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