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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사양>7

05. “나카이 씨! 일어나요, 불이에요!” (마지막 회) 뱀 알 사건이 있고 나서 열흘 정도 지나자 불길한 일이 또 일어나, 어머니를 더욱 깊은 슬픔에 빠뜨렸고 끝내 명을 앞당겼다. 내가, 불을 낸 것이다. 내가 불을 내다니. 내 생애 그토록 무서운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어려서부터 지금껏 꿈에서조차 한 번도 생각해본적 없었는데. 불을 소홀히 하면 불이 난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도 알지 못할 만큼, 나는 소위 ‘공주님’이었던 걸까. 밤중에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나 현관 칸막이 옆까지 갔는데, 욕실 쪽이 환했다. 무심코 들여다보니 욕실 유리문이 새빨갛고 타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잰걸음으로 달려가 욕실 쪽문을 열고 맨발로 밖에 나가 보니, 욕실 아궁이 옆에 쌓아 올린 장작더미가 맹렬한 기세로 타고 있었다. 정원과 맞닿은 아랫집 농가로 달려가 있는 힘껏 문을 두드리며.. 2022. 6. 22.
04. 그건 단순한 병이 아니야 정오 무렵, 아랫마을 의사 선생님께서 다시 오셨다. 지난 번처럼 하카마 차림은 아니었지만, 흰 버선만은 여전히 신고 있었다. “입원하는 게…….” 내가 여쭈자, “아니, 그럴 것까진 없습니다. 오늘은 센 주사를 놓아드릴테니 열도 곧 내릴 겁니다.” 하고 여전히 미덥잖은 대답을 하며, 소위 그 센 주사를 놓고 가셨다. 하지만 그 센 주사가 효험이 있었던지, 그날 정오가 지나자 어머니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며 땀이 비 오듯 흘렀다. 젖은 잠옷을 갈아입으시던 어머니가 웃으며 말씀하셨다. “명의인가 보다.” 열은 37도로 내려가 있었다. 나는 기뻐서 이 마을에 하나 뿐인 객점으로 달려가 주인아주머니께 부탁해 달걀 열 개를 얻어 바로 어머니께 반숙을 해드렸다. 어머니는 반숙 세개와 죽 반 그릇을 드셨다. 이튿.. 2022. 6. 21.
04. “가즈코가 있어서, 가즈코가 있어 줘서, 이즈로 가는 거야.” 어머니는 놀랄 만큼 늙고 힘없는 목소리로 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가즈코가 있어서, 가즈코가 있어 줘서, 이즈로 가는 거야. 가즈코가 있어 주니까.”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엉겁결에 여쭈었다. “제가 없었으면요?” 그랬더니 어머니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셨다. “죽는 게 낫지.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 집에서, 엄마도, 죽어버리고, 싶어.” 띄엄띄엄 말씀하시다가 끝내 서럽게 우셨다. 어머니는 이제껏 내게 단 한 번도 이런 약한 소리를 하신 적이 없었고, 또한 이토록 애통하게 우는 모습을 보인 적도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내가 시집갈 때도, 배속에 아기를 품고 어머니 곁으로 돌아왔을 때도, 아기가 병원에서 죽은 채 태어났을 때도, 내가 병으로 몸져누웠을 때도, 또 나오지가 나쁜 짓을 했을 때도,.. 2022. 6. 20.
03. “아침부터 정원을 돌아다녔어요.” 저녁 무렵, 어머니와 응접실에서 차를 마시며 정원 쪽을 바라보는데, 세 번째 돌계단에 오늘 아침 그 뱀이 다시 스르르 나타났다. 어머니도 뱀을 발견하고, “저 뱀은?” 하며 일어나 내게로 달려오시더니 내 손을 꼭 잡고 서서 꼼짝도 하지 않으셨다. 그 말에 나도 문득 짚이는 바가 있어, “알의 어미?” 하고 입에 올리고 말았다. “그래, 맞아.” 어머니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우리는 손을 맞잡고 숨죽인 채 잠자코 그 뱀을 지켜보았다. 돌 위에 구슬프게 웅크리고 있던 뱀은 비틀비틀 다시 움직이는가 싶더니, 힘없이 돌계단을 가로질러 제비붓꽃 쪽으로 기어들어 갔다. “아침부터 정원을 돌아다녔어요.” 내가 작은 소리로 말하자, 어머니는 한숨을 내쉬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시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그래.. 2022. 6. 19.
02. “태워버리자.” 어떤 참을 수 없는 부끄러운 생각이 덮쳐 오면, 그 기묘한, ‘아’ 하는 희미한 소리가 터져 나오곤 했다. 방금 내 가슴에 불쑥, 6년 전 이혼하던 때의 일이 선명하게 떠올라 견딜 수 없어져서, 나도 모르게 ‘아’ 소리가 새어 나온 건데, 어머니는 무슨 이유였을까? 어머니한테 나처럼 부끄러운 과거가 있을 리는 없는데. 아니, 어쩌면, 뭔가 있는 건가. “어머니도 방금 뭔가 떠오르신 거죠? 뭐예요?” “잊어버렸어.” “저랑 상관있는 일이에요?” “아니.” “그럼 나오지랑 상관있는 거예요?” “그럴…….” 어머니는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갸웃하더니, “지도 모르지.”라고 하셨다. 동생 나오지는 대학에 다니다 징집되어 남방의 섬으로 갔는데, 소식이 끊겨버린 통에 전쟁이 끝났는데도 찾을 수 없었다. 어머니는 이.. 2022. 6. 17.
01. 우리 집안에도 진짜 귀족은 어머니뿐일 거야 “아.” 아침에 식당에서 수프를 한 수저 살짝 떠 드시던 어머니가 희미하게 외마디 소리를 내셨다. “머리카락?” 수프에 뭔가 불쾌한 거라도 들었나 싶었다. “아니.” 어머니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사뿐히 수프를 한술 입에 흘려 넣으시고는, 새초롬하게 고개를 옆으로 돌려 부엌 창문 너머 활짝 핀 산벚꽃을 바라보더니, 그렇게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다시금 사뿐히 수프 한 입을 조그만 입술 사이로 미끄러트리듯 넣으셨다. 사뿐히, 라는 표현은 어머니에게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여성 잡지 같은 데서 나오는 식사법과는 완전히 다르다. 언제가 남동생 나오지가 술을 마시면서 누나인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작위(爵位, 1869년부터 1947년까지 존재했던 일본의 귀족 제도. 공작·후작·백작·자작·남.. 2022. 6. 16.
00. <사양> 연재 예고 절망과 희망을 함께 담아낸 아름다운 빛, 『사양』 역자 후기 강릉의 해가 저물어갑니다. 분홍빛, 초록빛, 물빛, 주홍빛……. 우주의 아름다운 빛이란 빛들이 모두 모여 하늘을 곱게 물들여 갑니다. 저는 지금 강릉에 있습니다. 작년, 강릉에서 1년살이를 하고 서울로 다시 돌아왔는데, 이 책을 옮기면서 강릉의 해 지는 풍경이 자꾸만 떠올라 번역의 막바지 작업 중, 기차에 올랐습니다. 아마 의아하실 겁니다. 강릉, 하면 일출이 가장 먼저 떠오를 테니까요. 하지만 그곳에 깃들어 살아가는 사람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곳 서쪽 어느 한 호수의 해 질 녘 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저녁 무렵 서쪽으로 기울어진 해, 석양. 새로운 것에 밀려 점점 쇠락해가는 것을 비유하는 말. 이 작품의 제목인 ‘사양(斜陽)’의 뜻입니.. 2022. 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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