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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사양>

02. “태워버리자.”

by BOOKCAST 2022. 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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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참을 수 없는 부끄러운 생각이 덮쳐 오면, 그 기묘한, ‘ 하는 희미한 소리가 터져 나오곤 했다. 방금 내 가슴에 불쑥, 6년 전 이혼하던 때의 일이 선명하게 떠올라 견딜 수 없어져서, 나도 모르게  소리가 새어 나온 건데, 어머니는 무슨 이유였을까? 어머니한테 나처럼 부끄러운 과거가 있을 리는 없는데. 아니, 어쩌면, 뭔가 있는 건가.
 
어머니도 방금 뭔가 떠오르신 거죠? 뭐예요?”
 
잊어버렸어.”
 
저랑 상관있는 일이에요?”
 
아니.”
 
그럼 나오지랑 상관있는 거예요?”
 
그럴…….”
어머니는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갸웃하더니,
지도 모르지.”라고 하셨다.
 
동생 나오지는 대학에 다니다 징집되어 남방의 섬으로 갔는데, 소식이 끊겨버린 통에 전쟁이 끝났는데도 찾을 수 없었다. 어머니는 이제 두 번 다시 나오지를 만날 수 없다고, 각오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지만, 나는 그런 각오 같은 걸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반드시 만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체념한 줄 알았는데, 맛있는 수프를 먹다 보니 나오지가 너무 보고 싶잖니. 좀 더 잘해 줄걸.”
 
나오지는 고등학교에 들어가고부터 별나다 싶을 정도로 문학에 빠져 불량소년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해서 어머니 속을 얼마나 썩였는지 모른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수프를 한술 드시고 나오지 생각에  하는 소릴 내신다. 나는 밥을 입안에 밀어 넣다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괜찮아, 나오지는 괜찮을 거예요. 걔 같은 악동은 쉽게 안 죽어요. 맨날 죽는 사람들 봐봐요. 죄다 얌전하고 예쁘고 착한 사람들뿐이잖아요. 나오지 같은 애는 몽둥이로 때려도 안 죽을걸요.”
 
그럼 우리 가즈코 양은 일찍 죽으려나?”
어머니는 웃으며 나를 놀리신다.
 
어머, 왜요? 전 못된 못난이라서 여든까지도 끄떡없거든요.”
 
그래? 그럼 엄만 아흔까지 끄떡없겠네.”
 
…….”
 
말을 꺼냈다가 조금 난처해졌다. 악당은 오래 산다, 아름다운 사람은 빨리 죽는다, 어머니는 아름답다, 하지만 오래 사셨으면 싶다. 나는 몹시 당황스러웠다.
 
너무해요!”
 
그렇게 말하는데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눈에선 눈물방울이 흘러내렸다.
 
뱀 이야기를 꺼내 볼까. 네댓새 전 오후, 동네 아이들이 정원 울타리 대숲에서 열 개쯤 되는 뱀 알을 발견했다.
 
아이들은 살무사 알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그 대숲에 살무사 열 마리가 태어나면 자칫 정원에도 못 내려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태워버리자.”
라고 했더니, 아이들이 뛸 듯이 기뻐하며 내 뒤를 따랐다. 대숲 근처에 나뭇잎과 마른 가지를 쌓아 올려 불을 놓고, 그 불 속에 알을 하나씩 던져 넣었다. 알은 좀체 타지 않았다. 아이들이 그 위에 나뭇잎과 잔가지를 더 얹어 불길을 세게 해도 알은 도통 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랫집 농가에 사는 처녀가 울타리 밖에서,
뭐 하고 있는 거예요?”
하고 웃으며 물었다.
 
살무사 알을 태우고 있어요. 살무사가 나오면 무섭잖아요.”
 
크기가 얼마만 한데요?”
 
메추리알만 하고 새하얘요.”
 
그럼 그거 그냥 뱀 알이에요. 살무사 알이 아니고요. 생알은 잘 안 타요.”
처녀는 재밌다는 듯 웃으며 가 버렸다.
 


30분가량 태웠는데도 도무지 알이 타지 않아서, 아이들에게 알을 도로 꺼내게 해 매화나무 밑에 묻게 하고, 조약돌을 모아 묘비를 만들어주었다.
 
, 모두 절하는 거야.”
 
내가 웅크려 합장하자 아이들도 내 뒤에 얌전히 웅크려 합장하는 것 같았다. 아이들과 헤어져 혼자 돌계단을 느릿느릿 오르는데, 돌계단 위 등나무 덩굴 그늘에 서 계시던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못된 짓을 했구나.”
 
살무사인 줄 알았는데 그냥 뱀이었어요. 그래도 잘 묻어 주었으니 괜찮을 거예요.”
 
말은 그렇게 했어도 어머니에게 들켜 찜찜했다.
어머니는 결코 미신을 믿는 분은 아니었지만, 10년 전 아버지가 니시카타초의 집에서 돌아가신 후로 뱀을 무척 두려워하신다. 아버지의 임종 직전, 어머니가 아버지의 머리맡에 가느다란 검정 끈이 떨어져 있는 걸 보고 무심코 주우려 했는데, 그게 뱀이었다. 뱀은 스르르 도망쳐 복도로 나가 사라져버렸고, 그걸 본 사람은 어머니와 와다 외삼촌, 둘뿐이었다. 두 분은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지만, 임종을 지키는 방이 소란스러워지지 않게 꾹 참고 가만히 계셨다고 한다. 우리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는데, 그 뱀에 대해서는 까맣게 몰랐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그날 저녁, 정원 연못가의 나무란 나무마다 뱀들이 기어 올라가 있던 광경은 나도 똑똑히 봐서 알고 있다. 지금 내가 스물아홉 된 아줌마니까 10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열아홉이었다. 이미 어린애가 아니었으니, 10년이 흘렀어도 그때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내가 영전에 바칠 꽃을 가지러 정원 연못 쪽으로 걷다가 연못가 철쭉 앞에 문득 멈춰 서서 보니, 그 철쭉 가지 끝에 작은 뱀이 휘감겨 있었다. 흠칫 놀라 옆에 있는 황매화를 꺾으려는데, 그 가지에도 뱀이 감겨 있었다. 그 옆의 물푸레나무에도, 어린 단풍나무에도, 금작화에도, 등나무에도, 벚나무에도 나무란 나무엔 죄다 뱀이 휘감겨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다지 무섭지 않았다. 뱀들도 나처럼 아버지의 죽음이 슬퍼 구덩이에서 기어 나와 아버지의 넋을 기리고 있구나 싶었을 뿐이다. 그러고서 어머니께 정원에서 본 뱀 이야기를 귀띔해 드렸더니, 어머니는 침착하게 고개를 갸웃하고 뭔가를 생각하는 눈치였지만 별다른 말씀은 없으셨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뱀 사건 이후로, 어머니가 뱀을 지독히 싫어하게 된 건 사실이다. 뱀을 싫어한다기보다는 뱀을 숭배하고 두려워하는 마음, 즉 경외심을 품게 되었다고나 할까.
 
어머니는 내가 뱀 알을 태운 걸 보고 분명 뭔가 몹시 불길한 기운을 느끼셨으리라. 그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나도 뱀알을 태운 게 굉장히 무서운 일인 것만 같아서, 이 일이 혹시 어머니께 재앙을 불러오는 건 아닐까 심히 염려되어, 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마음속에 담아두던 터였는데, 오늘 아침 식당에서 아름다운 사람은 일찍 죽는다느니 따위의 헛소리를 생각 없이 내뱉었다가, 결국 어찌할 바를 몰라 울어버렸다. 아침 식사 설거지를 하면서 왠지 내 가슴속에 어머니 명을 앞당길 섬뜩한 뱀 한 마리가 들어앉은 것 같아, 못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날, 나는 정원에서 뱀을 보았다. 무척 포근하고 맑은 날이라 부엌일을 마치고 정원 잔디에 등의자를 내놓고 뜨개질할 생각이었다. 등의자를 들고 정원으로 내려갔는데 정원석 부근 조릿대에 뱀이 있었다. ‘, 징그러워’, 나는 단지 그렇게 생각했을 뿐, 그 이상 깊이 생각지도 않고, 등의자를 들고 돌아와 툇마루에 올려놓고 앉아서 뜨개질을 시작했다. 오후에 정원 구석의 불당 안에 둔 장서 가운데 로랑생(1885~1956. 감미롭고 섬세한 화풍을 지닌 프랑스의 화가.)의 화집을 꺼내 오려고 정원으로 내려갔는데, 잔디 위로 뱀이 천천히 기어가고 있었다. 아침에 본 뱀이랑 똑같았다. 호리호리하고 기품 있는 뱀이었다. 나는 암컷이리라 생각했다. 뱀은 잔디밭을 조용히 가로질러 찔레나무 그늘로 가 멈추더니, 고개를 들고 가느다란 불꽃같은 혀를 날름거렸다. 그러고는 주위를 둘러보는 듯하다가, 이내 고개를 떨구고 우울한 듯 몸을 웅크렸다. 나는 그때도 그저 아름다운 뱀이겠거니 싶을 뿐이었다. 이윽고 불당에 가서 화집을 꺼내 돌아오는 길에 아까 뱀이 있던 자리를 흘끗 봤지만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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