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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사양>

04. “가즈코가 있어서, 가즈코가 있어 줘서, 이즈로 가는 거야.”

by BOOKCAST 2022.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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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놀랄 만큼 늙고 힘없는 목소리로 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가즈코가 있어서, 가즈코가 있어 줘서, 이즈로 가는 거야. 가즈코가 있어 주니까.”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엉겁결에 여쭈었다.
제가 없었으면요?”
 
그랬더니 어머니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셨다.
죽는 게 낫지.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 집에서, 엄마도, 죽어버리고, 싶어.”
띄엄띄엄 말씀하시다가 끝내 서럽게 우셨다.
 
어머니는 이제껏 내게 단 한 번도 이런 약한 소리를 하신 적이 없었고, 또한 이토록 애통하게 우는 모습을 보인 적도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내가 시집갈 때도, 배속에 아기를 품고 어머니 곁으로 돌아왔을 때도, 아기가 병원에서 죽은 채 태어났을 때도, 내가 병으로 몸져누웠을 때도, 또 나오지가 나쁜 짓을 했을 때도, 어머니는 결코 이런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0년 동안, 어머니는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와 조금도 다름없이, 여유롭고 자상한 분이셨다. 그래서 우리도 맘껏 어리광을 부리며 자랄 수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이제 돈이 다 떨어졌다. 전부 우리를 위해서, 나와 나오지를 위해서,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으시고 다 써버렸다. 이젠 오랜 세월 정든 집을 떠나 이즈의 작은 산장에서 나와 단둘이, 외로운 생활을 꾸려가야만 한다.
 


만약 어머니가 심술이 그득하고, 인색하고, 우리를 나무라고, 또 몰래 자기 돈 불릴 꿍꿍이만 있던 분이라면, 아무리 세상이 변했어도 이렇게 죽고 싶어 하시진 않았으련만, 아아, 돈이 떨어진다는 건 이 얼마나 무섭고, 비참하고, 구원 없는 지옥인가, 난생처음 깨달은 생각에 가슴이 미어졌다. 너무나 괴로워서 울고 싶어도 울 수 없었다. 인생의 엄숙함이란 이런 기분을 말하는가, 옴짝달싹도 할 수 없어서, 바로 누운 채로 돌덩이처럼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다음 날도 어머니는 역시나 안색이 안 좋고, 여전히 꾸물거리시며 조금이라도 오래 이 집에 머물고 싶은 눈치였지만, 와다 외삼촌이 오셔서 이제 짐은 거의 부쳤으니 오늘 이즈로 출발하자고 하자, 어머니는 마지못해 외투를 걸치고 작별 인사를 하는 오키미와 다른 사람들에게 말없이 꾸벅 인사를 하신 뒤, 우리 셋은 니시카타초의 집을 나섰다.
 
기차는 비교적 한산해서 세 사람 모두 앉을 수 있었다. 기차 안에서 외삼촌은 기분이 무척 좋은지 노래를 흥얼거렸지만, 어머니는 백지장 같은 얼굴을 떨군 채 몹시 추워하셨다. 미시마에서 슨즈 철도로 갈아타고, 이즈 나가오카에서 하차한 뒤 버스로 15분 정도 간 다음, 다시 내려서 산 쪽으로 완만한 비탈길을 오르니 작은 마을이 나왔고, 그 마을 변두리에 중국풍으로 지어진 그럴듯한 산장이 보였다.
 
“어머니, 생각보다 좋은 곳이네요.”
나는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그렇구나.”
어머니도 산장 현관 앞에 서서 한순간 기쁜 표정을 지으셨다.

“무엇보다 공기가 좋아. 얼마나 맑고 깨끗한지.”
 
외삼촌이 자랑스레 말씀하셨다.
“정말.”
 
어머니는 미소 지으시며 말을 이었다.
“맛있어, 여기 공기 참 맛있다.”
 
그리고 세 사람은 웃었다.
 
현관에 들어서자 도쿄에서 부친 짐이 도착하여 현관이건 방이건 온통 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방에서 보는 전망이 또 굉장하단다.”
외삼촌은 들떠서 우리를 방으로 끌어다 앉혔다.
 
오후 3시쯤의 겨울 햇살이 정원 잔디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잔디에서 돌계단을 내려가면 작은 연못이 있고 매화나무가 즐비했으며, 정원 아래에는 귤밭이 펼쳐져 있고, 거기서부터 마을 길이 나 있었다. 그 너머로는 논이, 또 그 너머로는 솔숲이, 그 솔숲 너머로는 바다가 보였다. 이렇게 방에 앉아 있으니, 바다의 수평선이 딱 내 가슴께에 닿을 높이였다.
 
“부드러운 경치야.”
어머니는 쓸쓸하게 말씀하셨다.
 
“공기 탓인가. 햇살이 도쿄랑 완전히 달라요. 빛이 비단결처럼 고와요.”
나는 신이 나서 말했다.
 
다섯 평짜리 방과 세 평짜리 방, 응접실, 한 평 반 크기의 현관과 욕실, 식당과 부엌, 그리고 2층에 큰 침대가 놓인 손님방이 전부였지만, 우리 두 사람, 아니, 나오지가 돌아와 세 사람이 된다 해도 딱히 불편할 것 같지 않았다.
 
외삼촌은 이 마을에서 딱 하나뿐이라는 객점에 식사를 주문하고 돌아와, 잠시 후 배달된 도시락을 방에 펼쳐 놓고 가져온 위스키를 드시면서, 이 산장의 전 주인인 가와다 자작과 중국 여행 중 있었던 실수담을 풀어놓으며 무척 흥겨워하셨으나, 어머니는 도시락에 아주 조금 젓가락만 대고 마셨다. 이윽고 사위가 어둑해지자, 조그만 소리로 말씀하셨다.
“이대로 잠깐 눕고 싶구나.”
 
나는 짐 속에서 이불을 꺼내 뉘어드리고는 혹시 몰라 체온계를 찾아 열을 재보니 39도였다.
외삼촌도 놀라며 아랫마을까지 의사를 찾아 나섰다.
 
“어머니!”
하고 불러도 맥을 못 추셨다.
 
나는 어머니의 자그만 손을 움켜잡고 흐느꼈다. 어머니가 너무 가여워서, 아니 우리 두 사람이 너무 가여워서, 울어도 울어도 멈출 수가 없었다. 울면서 정말 이대로 어머니와 함께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제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 우리의 인생은 니시카타초의 집을 나서는 순간 이미 끝났다고 생각했다.
 
두어 시간 지나서 외삼촌이 아랫마을의 의사 선생님을 모시고 왔다. 선생님은 연세가 지긋해 보였는데, 센다이히라 하카마(센다이 지방에서 나는 옷감으로 만든 하카마. 하카마는 일본 전통 의상으로 기모노 위에 덧입는 통이 넓은 하의를 말한다.)를 입고 흰 버선을 신고 있었다.
 
“폐렴에 걸릴지도 모릅니다. 허나 폐렴에 걸려도 걱정하실 건 없습니다.”
 
진찰이 끝나고 뭔가 미덥잖은 말씀을 하시더니 주사를 놓아준 뒤 가셨다.
 
다음 날도 어머니의 열은 내리지 않았다. 외삼촌은 내게 2천 엔을 건네며, 혹여 입원해야 하는 일이 생기면 전보를 치라는 말을 남기고, 일단 도쿄로 돌아가셨다.
 
나는 짐 속에서 필요한 취사도구만 꺼내 죽을 쑤어 어머니께 권했지만, 어머니는 누운 채로 세 숟가락 드시고는 고개를 내저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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