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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사양>

03. “아침부터 정원을 돌아다녔어요.”

by BOOKCAST 2022. 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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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무렵, 어머니와 응접실에서 차를 마시며 정원 쪽을 바라보는데, 세 번째 돌계단에 오늘 아침 그 뱀이 다시 스르르 나타났다.
 
어머니도 뱀을 발견하고,
저 뱀은?”
 
하며 일어나 내게로 달려오시더니 내 손을 꼭 잡고 서서 꼼짝도 하지 않으셨다. 그 말에 나도 문득 짚이는 바가 있어,
알의 어미?”
하고 입에 올리고 말았다.
 
그래, 맞아.”
어머니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우리는 손을 맞잡고 숨죽인 채 잠자코 그 뱀을 지켜보았다. 돌 위에 구슬프게 웅크리고 있던 뱀은 비틀비틀 다시 움직이는가 싶더니, 힘없이 돌계단을 가로질러 제비붓꽃 쪽으로 기어들어 갔다.
 
아침부터 정원을 돌아다녔어요.”
 


내가 작은 소리로 말하자, 어머니는 한숨을 내쉬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시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그래. 알을 찾고 있는 거야. 가엾어라.”
 
나는 후후 웃을 수밖에 없었다.
 
석양이 어머니의 얼굴을 비추자, 그 눈이 파랗게 빛나고, 희미하게 분노가 깃든 얼굴은 와락 안기고 싶을 만큼 아름다웠다. 그리고 아아, 어머니의 얼굴은 아까 그 슬픈 뱀과 어딘가 닮아 있었다. 내 가슴속에 깃든 흉측한 살무사가, 언젠가 이 깊은 슬픔에 찬 아름다운 어미 뱀을 잡아먹진 않을까,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보드랍고 가냘픈 어머니의 어깨에 손을 얹고서 까닭 모를 몸서리를 쳤다.
 
우리가 도쿄 니시카타초의 집을 버리고 이즈에 있는 이곳 중국풍 산장으로 이사한 건,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그해 12월 초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우리 집 가계는 어머니의 남동생이자 이제 어머니의 유일한 혈육인 와다 외삼촌이 전부 보살펴주셨는데, 전쟁이 끝나고 세상이 변하자, 외삼촌이 어머니께 더는 안 되겠다, 집을 파는 수밖에 없다, 하녀들도 모두 내보내고 모녀 둘이 어디 시골에 아담한 집을 사서 편안히 사는 게 좋겠다고 말한 눈치였다. 어머니는 돈에 관해서라면 애들보다도 세상 물정에 어두운 분이라, 외삼촌이 그리 말씀하시니 그럼 잘 부탁한다며 맡기신 모양이었다.
 
11월 말에 외삼촌으로부터 속달 우편이 왔다. 슨즈 철도 근처에 가와다 자작의 별장이 나왔다, 집은 고지대라 전망이 좋고 밭도 100평 정도 딸린 데다, 그 일대는 매화 명소로 겨울은 따뜻하고 여름엔 시원하니 살아보면 분명 마음에 드실 거다, 그쪽과 직접 만나 얘기를 좀 해봐야 하니, 내일 일단 긴자의 내 사무실로 와주길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어머니, 가실 거예요?”
 
그야, 내가 부탁했으니까.”
내가 묻자 어머니는 몹시 쓸쓸하게 웃으며 대답하셨다.

이튿날, 예전 운전사였던 마쓰야마 씨에게 동행해달라고 부탁해, 어머니는 정오가 조금 지나 외출하셨다가 저녁 8시쯤에 마쓰야마 씨와 돌아오셨다.
 
결정했어.”
내 방으로 들어온 어머니는 책상 위에 손을 짚고 그대로 맥없이 주저앉으시며 말씀하셨다.
 
결정했다니, 뭘요?”
 
전부.”
 
?”
 
나는 화들짝 놀랐다.
어떤 집인지 보기도 전에…….”
 
어머니는 책상 위에 한쪽 팔꿈치를 대고 이마를 살짝 짚은 채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외삼촌이 좋은 곳이라 했으니, 난 그냥 눈 딱 감고 그 집으로 옮겨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
그렇게 말하며 얼굴을 들고 엷게 미소 지으시는 어머니.
그 얼굴은 조금 수척하고 아름다웠다.
 
그래요.”
나도 외삼촌에 대한 어머니의 아름다운 신뢰에 맞장구를 쳤다.
 
그럼 저도 눈 딱 감아야죠 뭐.”
 
둘이서 소리 내 웃었지만, 웃고 나니 더 쓸쓸해졌다.
 
그 후, 매일같이 집에 인부가 와 이삿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외삼촌도 찾아와 팔 만한 물건들은 팔아 치울 수 있게끔 손을 써주셨다. 나는 하녀 오키미와 둘이서 옷 정리를 하거나 정원에서 잡동사니를 태우느라 분주했는데, 어머니는 거들지도 않고 그렇다고 딱히 뭘 시키는 일도 없이, 괜히 방 안에서 꾸물거리기만 하셨다.
 
왜 그러세요? 이즈에 가기 싫어진 거예요?”
큰맘 먹고 조금 퉁명스럽게 물어도,
 
아니.”
하고 멍한 얼굴로 답하실 뿐이었다.
 
열흘가량 지나자 정리가 다 끝났다. 저녁 무렵, 정원에서 오키미와 둘이 휴지며 지푸라기를 태우고 있는데, 어머니도 방에서 나와 툇마루에 서서, 우리가 피운 모닥불을 말없이 보고 계셨다. 잿빛 같은 차가운 서풍이 불어와 연기가 나지막이 땅 위를 기어갔다. 문득 어머니의 얼굴을 올려다보니 어머니의 낯빛이 여태껏 본 적 없을 정도로 안 좋아 깜짝 놀라 소리쳤다.
어머니, 안색이 안 좋아요!”
 
그러자 어머니는 엷게 웃으시며,
괜찮아.”
하시고는 방으로 슬그머니 들어가셨다.
 
그날 밤, 이미 이불을 싸버린 터라, 오키미는 2층 방 소파에서, 어머니와 나는 옆집에서 빌려온 이불 한 채를 어머니 방에 펴고 함께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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