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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사양>

01. 우리 집안에도 진짜 귀족은 어머니뿐일 거야

by BOOKCAST 2022. 6.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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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에 식당에서 수프를 한 수저 살짝 떠 드시던 어머니가 희미하게 외마디 소리를 내셨다.
 
머리카락?”
 
수프에 뭔가 불쾌한 거라도 들었나 싶었다.
 
아니.”
 
어머니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사뿐히 수프를 한술 입에 흘려 넣으시고는, 새초롬하게 고개를 옆으로 돌려 부엌 창문 너머 활짝 핀 산벚꽃을 바라보더니, 그렇게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다시금 사뿐히 수프 한 입을 조그만 입술 사이로 미끄러트리듯 넣으셨다. 사뿐히, 라는 표현은 어머니에게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여성 잡지 같은 데서 나오는 식사법과는 완전히 다르다. 언제가 남동생 나오지가 술을 마시면서 누나인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작위(爵位, 1869년부터 1947년까지 존재했던 일본의 귀족 제도. 공작·후작·백작·자작·남작의 다섯 계급이 있었으며 화족(華族)이라고 불렸다.)가 있다고 다 귀족이 아니야. 작위가 없어도 기품이라는 걸 타고난 고결한 귀족이 있는가 하면, 우리처럼 작위는 있어도 귀족은커녕 천민 비스름한 사람도 있어. 이와지마(나오지의 친구인 백작을 들먹이며) 같은 녀석은 진짜로 신주쿠 유흥가의 호객꾼보다 훨씬 천박하단 말이야. 요전에도 야나이(역시 동생의 학교 친구로 자작의 차남을 들먹이며)의 형님 결혼식에 그 멍청이 놈이 턱시도 나부랭이를 입고 왔더라니까. 대체 그딴 걸 왜 입고 오느냐고. 뭐 그건 그랬다 쳐. 그 자식이 테이블 스피치 때는 어땠게? ‘있사오니같은 희한한 말투로 지껄이는 통에 토할 뻔했잖아. 잘난 척은 품위랑은 눈곱만큼도 상관없는 어쭙잖은 허세야. 고급 하숙이라고 써 놓은 간판이 혼고 부근에 널리고 널렸어도, 사실 화족이라는 작자들은 거의 다 고급 거지라고나 할까. 진짜 귀족은 이와지마처럼 어설픈 잘난 척은 안 해. 우리 집안에도 진짜 귀족은 어머니뿐일 거야. 진짜야. 아무도 못 당한다니까.”
 
수프를 먹을 때만 해도 그렇다. 우리는 접시 위에 고개를 약간 숙이고 스푼을 옆으로 쥔 다음 수프를 떠서 그대로 입에 가져가지만, 어머니는 식탁 가장자리에 왼손 손가락을 가볍게 얹고 상체와 얼굴을 꼿꼿이 들고서, 접시도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스푼을 가로로 눕혀서는, 제비처럼 가볍고 정확하게 스푼을 입과 직각이 되도록 가져가, 스푼 끝에서 수프를 입술 사이로 흘려 넣으신다. 그러고는 무심히 주위를 곁눈질하면서, 폴랑폴랑 흡사 스푼을 작은 날개처럼 놀리며, 단 한 방울도 흘리는 일 없이, 후루룩 소리도 접시 소리도, 전혀 내지 않으신다. 그것이 소위 정식 예법에 맞지 않는 식사법일지언정, 내 눈에는 무척이나 귀엽고 그야말로 진짜처럼 보인다. 또한, 사실 수프 같은 음식은 몸을 숙여 스푼을 옆으로 해서 입에다 넣는 것보다는, 상체를 세우고 느긋하게 스푼 끝에서부터 입안에 흘려 넣으며 먹는 게 희한할 정도로 더 맛난 법이다. 하지만 나는 나오지의 말처럼 고급 거지라서, 어머니처럼 가볍고 능숙하게 스푼을 다루질 못하니, 별수 없이 단념하고 접시 위에 고개를 숙이고서, 이른바 정식 예법에 따라 우중충한 방식으로 먹는다.
 
수프뿐만이 아니라 어머니의 식사법은 꽤나 예법에 어긋난다. 고기가 나오면, 단숨에 나이프와 포크로 모두 잘게 썬 다음, 나이프를 내려놓고 포크를 오른손으로 옮겨 쥐고선 한 점 한 점 포크로 찍어 천천히 맛을 즐기신다. 또 뼈 있는 치킨은 우리가 접시 소리를 내지 않고 살을 발라내려고 애쓰는 사이, 어머니는 아무렇지도 않게 손끝으로 뼈를 집어들어 입으로 살을 발라내고는 시치미를 떼신다. 그런 야만스러운 동작도 어머니가 하면 귀여움을 넘어서 묘하게 에로틱하기까지 하니 과연 진짜란 다르다. 뼈 있는 치킨뿐 아니라 점심 반찬인 햄이나 소시지 같은 것도 손끝으로 살짝 집어 드시곤 한다.
 
주먹밥이 왜 맛있는지 아니? 그건 말이야. 사람이 손가락으로 꽉 쥐어서 만들기 때문이야.”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신 적도 있다.


정말 손으로 집어 먹으면 맛있겠다 싶은 적도 있지만, 나같은 고급 거지가 섣불리 흉내 냈다간 그야말로 진짜 거지꼴이 돼 버릴 것 같아서 꾹 참고 있다.
 
동생 나오지도 어머니한텐 못 당하겠다고 했지만, 정말이지 나 역시 어머니를 따라 할 엄두조차 못 내는 터라 절망 비슷한 감정마저 든다. 언젠가 초가을의 달 밝은 밤, 니시카 타초의 집 안뜰 연못가 정자에서 어머니와 단둘이 달맞이를 한 적이 있다. 여우가 시집갈 때랑 쥐가 시집갈 때의 몸단장은 뭐가 다를까, 웃으면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별안간 어머니가 벌떡 일어나더니 정자 옆 싸리 덤불 속으로 들어가셨다. 그러고는 하얀 싸리꽃 사이로 그보다 더 새하얀 얼굴을 쏙 내밀고 미소 지으며 말씀하셨다.
 
가즈코, 엄마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맞혀 보렴.”
 
꽃을 꺾고 계세요.”
 
내 대답에 어머니는 속삭이듯 웃으며 말씀하셨다.
 
쉬하고 있단다.”
 
쭈그려 앉은 기색이 조금도 없어서 놀랐으나, 나 같은 건 죽었다 깨나도 흉내 낼 수 없는, 참으로 사랑스러운 느낌이었다.
 
오늘 아침 수프 이야기를 하다 딴 길로 새버렸지만, 얼마 전 어떤 책을 읽다가, 루이 왕조 시대의 귀부인들은 궁정이나 복도 구석 같은 데서, 아무렇지도 않게 오줌을 눴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 무심함이 못내 사랑스러워 우리 어머니도 진짜 그런 귀부인의 마지막 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는 수프를 한술 드시다가  하고 조그만 소리를 내시기에, “머리카락?” 하고 여쭈니 아니라고 하신다.
 
짜요?”
 
오늘 아침 수프는 요전에 미국이 배급한 완두콩 통조림을, 내가 체에 내려 포타주처럼 만든 것이다. 원래 요리에는 자신이 없던 터라 어머니에게서, “아니라는 말을 듣고도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아 그리 물은 것이다.
 
맛있게 잘 만들었어.”
 
어머니는 진지하게 말하며 수프를 다 비우시고는, 김으로 싼 주먹밥을 손으로 집어 드셨다.
 
나는 어릴 때부터 아침엔 입맛이 없어서 한 10시쯤이나 돼야 배가 고팠다. 그날도 수프만은 가까스로 먹었지만, 다른 음식은 딱히 입맛이 당기지 않아 접시에 주먹밥을 올려놓고 젓가락으로 마구 헤집고서 한 덩이 집었다. 그러고는 어머니가 수프를 드실 때처럼, 젓가락을 입과 직각이 되도록 해서, 마치 새끼 새에게 먹이를 주듯 입에 밀어 넣고 깨작거렸다. 그러는 동안 어머니는 어느새 식사를 마치고 살며시 일어나 아침 햇살이 비치는 벽에 등을 기대고 잠시 밥 먹는 내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말씀하셨다.
 
가즈코는 아직 안 되겠구나. 아침밥을 가장 맛있게 먹어야 하는데.”
 
어머닌 맛있어요?”
 
그럼 맛있지. 엄만 이제 환자가 아니란다.”
 
나도 환자 아니에요.”
 
아냐, 멀었어.”
 
어머니는 쓸쓸히 웃으며 고개를 저으셨다.

나는 5년 전에 폐병으로 앓아누운 적이 있지만, 그건 제멋대로 살다 생긴 작은 병이었다. 하지만 얼마 전 어머니가 앓으신 병은, 그야말로 걱정스러울 정도로 심각한 병이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내 걱정만 하신다.
 
.”
 
내가 외마디 소릴 냈다.
 
왜 그러니?”
 
이번에는 어머니 쪽에서 되묻는다.

얼굴을 마주 보고 서로 뭔가 알았다는 것을 눈치채고 후후후 내가 웃자, 어머니도 싱긋 웃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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