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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세이/<고독한 사람들의 도시>11

10. 파리_상젤리제 거리에서 죽다. (마지막 회) 어디에서든 벤치에 앉아 상념에 잠길 때면 나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몇 가지 장면이 있다. 하나는 스페인 영화 . 매혹적인 미망인에게 빠져 자기만을 바라보는 여인을 죽일 마음을 품게 되는 남자. 오래된 연인이 앉은 벤치 아래로 하나둘 떨어지는 핏방울. 붉게 번져가던 치명적인 욕망의 끝. 다음으로 고독하기 이를 데 없는 대만 영화 . 그 마지막처럼 벤치에 앉아 울었던 적이 있다. 그들도 나도 언제나 홀로 남겨지던 삶.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장면. 눈 내리는 공원 벤치에 앉아 ‘마치 대단한 밤이 다가오는 것처럼’ 하품을 하고 또 하는 남자. “그래, 돌아갈 시간이야. 안 그러면 문이 닫힐 거야.” 천천히 밤이 오고, 그는 그 자리에서 눈사람이 되어 죽음을 맞는다. 외덴 폰호르바트의 소설 『우리 시대의 아이』는 .. 2022. 3. 16.
09. 오베르 쉬르 우아즈_까마귀 나는 언덕 걸어서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작고 다정한 오베르의 오후. 고흐의 그림 속 배경이 되었던 오베르 성당은 공사 중이고, 시청사는 12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림과 똑같은 모습으로 라부 여관 앞에 서 있다. 관광안내소 옆에선 주말장터가 한창이고, 소박한 집들의 마당엔 들꽃 향기 가득하고, 마주치는 주민들은 수줍고도 상냥하다. 파리에선 이렇게 조용히 얘기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없었다. 이슬비 왔다 간 잿빛 거리. 추위에 오스스 떨며 바람 속을 걸어 오른 언덕. 묘지 앞에 한참을 앉아 있다 고흐의 마지막 그림으로 알려진 의 배경 앞에 섰다. 황금빛 밀밭 대신 잡초뿐인 들판이 펼쳐져 있고, 맞은편의 옥수수밭은 수확도 하지 않은 채 까마귀들이 쪼아 먹은 흔적만 남아 있다. 그 속에 외롭게 서 있는 고흐의 그림 안.. 2022. 3. 15.
08. 베네치아_물 위의 도시에서 어느 날과 그 다음날. 그 둘이 완벽하게 다른 날이 되기도 한다. 가까이 존재하던 이가 갑자기 세상에서 사라졌을 때, 나는 이전의 나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래도 삶은 계속되고, 그래서 나는, 달라진 나인 채로 여행을 떠났다. 1년 전에 숙소를 예약해 둔 곳이 두 번째 찾는 베네치아였고, 하필 찬 바람부는 가을이었고, 늦은 오후 산타 루치아 역에 도착해 어두운 호텔 방에서 불면의 밤을 보내고 나니 도시가 바닷물에 잠겨 있었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아쿠아 알타(Acqua alta)인가. 전날의 베네치아와 완전히 다른 베네치아에서, 나는 어디로 향하든 막힌 길을 돌아 오래도록 걸어야 했고, 무엇을 하든 물 위에 서 있어야만 했다. 그래도 삶이 계속되었던 것처럼, 그래도 어딘가에 길이 있었다. 이러다.. 2022. 3. 14.
07. 피렌체_어느 실업자의 죽음 유배지 같은 그 시골 마을에서, 저녁이면 푸줏간 주인이나 벽돌공들과 어울려 카드놀이를 하고 사소한 다툼을 하며 불한당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던 그의 편지는 몹시 마음 아픈 구석이 있다. 그렇게라도 또 다른 일상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밤이면 몸을 정제하고 관복으로 갈아입은 후 서재에서 글을 써 내려간 마키아벨리. 그렇게 보내는 네 시간 동안 “모든 고뇌를 잊고, 가난도 두렵지 않게 되고, 죽음에 대한 공포도 느끼지 않는다”던 그는 위대한 정치 철학자이자 위태로운 조국 이탈리아를 걱정한 사상가였음이 틀림없지만, 어쩌면 평범한 생활인으로 살아가기를 가장 열망했을지도 모르겠다. 철저히 현실적이고 계산된 정치론으로 인해 권력자들을 위한 조언자, 권모술수를 가르치는 악의 화신으.. 2022. 3. 12.
06. 로마_달콤한 삶은 어디에 있는가? 성스러운 길, ‘Via Sacra’라 이름 붙여진 거리를 걸어 고대 로마의 중심지 포로 로마노에 도착했다. 뜨거운 태양 아래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한 비. 티투스의 개선문 아래에서 여우비를 피하러 모여든 몇몇 여행자들끼리 가벼운 인사를 나누었다. 여행하다 보면, 서로 눈만 마주쳐도 웃음 짓게 되고 이야기를 꺼내게 되는 특별한 경험을 자주 하게 된다. 대화를 나눌 순간, 혹은 그와 동행중인 침묵을 지켜줘야 할 순간을 구별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여행으로 터득하게 되는 값진 미덕 중의 하나일 것이다. 무성한 잡초와 고양이들, 귀퉁이만 남은 처마를 위태롭게 이고 있는 기둥, 여기저기 나뒹구는 건축물들의 잔해, 머리가 없는 조각상, 초라한 카이사르의 무덤, 폐허라기엔 여전히 압도적인 느낌을 주는 공공 광장. 찬란.. 2022. 3. 11.
05. 신트라_비밀의 숲의 은둔자 거친 바다 앞에 선다는 것은, 지나간 모든 고통과 은총 앞에 숙연해진다는 것. 해와 달의 사연이 바다의 깊이를 바꾸고, 가까웠다가 멀어지는 타원의 궤도 위에서 바람이 불고 청춘이 졌다. 언제쯤이었나. 휘몰아치는 파도 앞에 서서 저 바다 너머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믿기 힘들었던 때. 여기가 정말 세상의 끝이 아니라면, 이렇게 해져버린 돛을 매달고 저 거친 바다를 아직 더 표류해야 한다는 것인지. 얼마나 부지런히 따라잡아야 늘 달아나버리는 경계에 닿을 수가 있나. ‘땅의 끝’, ‘세상의 끝’이라 불리던 그곳에 가보고 싶었다. 카보 다 호카(Cabo da Roca). 카보는 곶이고, 호카는 ‘미친 사람’이란 뜻이니 우리말로 ‘미친 사람의 곶’이다. 그렇겠지. 세상의 끝에 서 있는 자, 곧 미친 사람이었을.. 2022. 3. 10.
04. 리스본_늙은 친구 같은 도시에서 전망대나 언덕 위의 계단에 앉아 멀리 푸르른 타호 강과 저물녘의 하늘을 바라보던 날들. 포르투갈 맥주인 사그레스(Sagres: 정말이지 최고의 맥주!) 한 병 외엔 아무것도 필요 없었던 시간. 16세기의 화려한 유산 제로니무스 수도원이나 리스본 대성당, 로마 시대 요새였던 상 조르지 성 등 리스본을 대표하는 명소들을 다 둘러보았지만, 내겐 좁고 투박하기 그지없던 골목에서의 시간이 진짜 리스본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자신들의 도시만큼이나 오래되고 지쳐 보이면서도 순수한 미소를 간직하고 있던 사람들. 유럽에서 리스본을 ‘늙은 조강지처 같은 도시’라 부른다더니, 나에겐 마치 시간을 감아 마주한 늙은 친구와도 같은 느낌이었다. 무언가 아득하면서 전혀 낯설지 않은, 포르투갈의 천재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가 『불안의 .. 2022. 3. 8.
03. 그라나다_안달루시아의 태양을 닮은 남자 단순한 존재조차 기쁨으로 만들어주는 탄력. 안달루시아는, 그랬다. 마지막 날. 비행기까지 직접 걸어가야 하는 작디작은 그라나다 공항 출국장에 앉아, 이 곳을 떠나기가 싫구나, 혼자서 얼마나 되뇌었는지. 1936년 여름, 그라나다의 언덕 위. 한 그루 올리브 나무 아래에서 몇 발의 총성이 울렸다. 독재자 프랑코의 군인들에게 갑작스레 처형당한 작가 로르카의 죽음은 전 세계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겼다. 영화 는 바로 거기에서 출발한다. 로르카의 시와 희곡에 빠져 있던 그라나다 소년들. 그들 중 한 명이 훗날 유명작가가 되어 자기를 문학의 세계로 이끌었던 로르카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밝혀내려 한다. 그때까지도 계속되고 있던 독재정권은 온갖 협박과 술수를 동원하여 그의 추적을 방해 하는데…. 영화 속 눈 덮인 .. 2022. 3. 7.
02. 마드리드_나를 피곤하게 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산다는 것 다시, 사랑을 잃는 것이 곧 죽음인 사람들이 있다. 거대한 우주 속, 지구 표면의 한 점 먼지 같은 자신의 존재를 오직 사랑의 이름으로 확인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사랑의 끝이 곧 죽음인 것은, 삶을 걸기 때문이다. 죽도록 사랑하기 때문이다. 마드리드 출신의 작가 마리아노 호세 데 라라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우연히 알게 된 라라의 삶에 관심이 생겨 단편적인 글들과 책까지 찾아 읽게 되었었다. 또 사랑인가. 그 끝은 역시 죽음. 필명 ‘피가로’. 19세기 초의 시인이자 평론가. 스페인 로맨티시즘을 대표하는 인물. 여기까지가 라라의 이력에 대해 알려진 바인데, 『열정』(로사 몬떼로 著)이란 책에 따르면 그는 대단히 총명했고(18세에 풍자비평집을 냈다), 권력과 관습에 대항하는 자유주의적 사상가이면서 때로 대.. 2022. 3. 6.
01. 바르셀로나_한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잊을 수 없다.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확실하다. 한순간 몰래 훔쳐보고 만 불가침의 영역. 위협적일 만큼 너무도 분명하지만, 어쩌면 무서운 속도로 해체되어버린 간밤의 짧은 꿈같은, 모순에 찬 놀라움. 나는 그 어떤 언어로도 사그라다 파밀리아(Sagrada Familia church, 성가족성당)를 마주한 순간의 경이로움을 설명할 수 없다. 전철역에서 내려 지상으로 올라온 뒤, 무심코 바라본 그곳에 가우디(Antoni Gaudí)의 성당이 서 있었다. 괴물 같은 입을 벌리고, 아니 내 어린 시절 상상했던 기묘하고도 장엄한 세계의 문을 열고. 얼어붙은 발걸음. 상상은 현실이 될 수 있는가? 이 모든 세상의 희비극 속에서도 인간의 꿈과 집념은 끝내 신에 가닿을 수 있는가? 그렇다고 말하겠다. 보.. 2022. 3. 4.
00. <고독한 사람들의 도시> 연재 예고 유럽의 골목길에서 그녀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prologue 이런 책을 쓰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 같은 사람이 장거리 여행을 다니게 된 것만도 기적 같은 일이었으니까. 대학 시절 가장 친했던 친구가 다른 친구와 배낭여행을 다녀왔을 때, 왜 내겐 말 한마디 없었는지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니가 어디 낯선 데 돌아다닐 위인이냐?” 생각해 보면, 나는 낯선 곳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다기 보다 삶 속의 변수를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세상의 위험과 혼란을 피해, 익숙한 나만의 공간 속에서 침잠하며 살아가는 것. 그런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나도 정확히 설명할 수 없다. 어느 날 문득 배낭을 메고 길 위에 섰고, 타이완에서 시작해 점점 더 먼 곳으로 떠나게 되었다. 프라하에서 환.. 2022. 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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