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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세이/<고독한 사람들의 도시>

03. 그라나다_안달루시아의 태양을 닮은 남자

by BOOKCAST 2022.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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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람브라(Alhambra)
 

단순한 존재조차 기쁨으로 만들어주는 탄력. 안달루시아는, 그랬다. 마지막 날. 비행기까지 직접 걸어가야 하는 작디작은 그라나다 공항 출국장에 앉아, 이 곳을 떠나기가 싫구나, 혼자서 얼마나 되뇌었는지.

 

단순한 존재조차 기쁨으로 만들어주는 탄력. 안달루시아는, 그랬다.
 


1936년 여름, 그라나다의 언덕 위. 한 그루 올리브 나무 아래에서 몇 발의 총성이 울렸다. 독재자 프랑코의 군인들에게 갑작스레 처형당한 작가 로르카의 죽음은 전 세계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겼다. 영화 <데스 인 그라나다(The Disappearance of Garcia Lorca)>는 바로 거기에서 출발한다. 로르카의 시와 희곡에 빠져 있던 그라나다 소년들. 그들 중 한 명이 훗날 유명작가가 되어 자기를 문학의 세계로 이끌었던 로르카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밝혀내려 한다. 그때까지도 계속되고 있던 독재정권은 온갖 협박과 술수를 동원하여 그의 추적을 방해 하는데….

영화 속 눈 덮인 시에라네바다 산맥과 알람브라 궁전의 붉은 성벽을 바라보며, 로르카 역할을 맡아 시를 낭송하는 앤디 가르시아를 보며, 언젠가 나도 저곳에 가서 로르카의 시를 읊어보리라 생각했었다. 이렇게 또 하나의 꿈을 이루었는데, 바람 속에 문득 그의 피 냄새가 배어 있는 것만 같아 마음이 시렸다.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의 한 장면이 기억난다. 의대생 시절의 체 게바라가 남미대륙 횡단 중에 휴식을 취하면서 시를 읊을 때, 옆에 있던 친구 알베르토가 묻는다.

“네루다? 아니면 로르카?”

누구의 시인지는 몰라도 그가 읊었다면 두 시인 중 한 사람의 작품이었을 거라는 얘기다. 체 게바라가 그만큼 네루다와 로르카를 좋아했던 모양이다.

로르카의 죽음을 미스터리하게 받아들이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직접적인 정치 활동을 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그러나 그가 늘 가난한 자들의 편이었고, 상당히 자유주의적인 태도를 지녔다는 것, 무엇보다 당시 민중들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갖고 있었던 사실 자체가 파시스트들에게 상당한 위협으로 느껴졌던 것 같다. 어쩌면 파시스트들이 두려워한 것은 그의 순수함과 직관이었는지도 모른다. 사회에 길들여지지 않고, 힘에 굴복하지 않으며, 세상의 모순을 꿰뚫어 볼 줄 아는 사람. 본능과 자유의 편인 그들이 바로 진정한 예술가들이고, 파시스트나 독재자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임이 틀림없다. 어느 여름밤 올리브 나무 아래 로르카가 쓰러져 간 이유가 바로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사실 그가 동성애자였던 것이 처형의 동기라는 주장이 힘을 얻기도 했지만 (당시 그라나다가 동성애에 대해 유별난 증오심을 가진 도시였다고 한다), 어쨌든 내게는 파시즘에 희생된 자유혼이자 가장 안달루시아적인 영혼을 가졌던 예술가로 기억되고 있다.

“너는 시간이 약이고 안 보면 멀어질 거라고 믿고 싶겠지만, 사실은 그게 아냐. 아무 소용없어. 골수에까지 박혀버린 화살은 아무도 뺄 수 없다고!”

로르카의 희곡 「피의 결혼」에서 결혼을 앞둔 신부를 찾아온 옛 애인이 확신에 차서 내뱉었던 말. 그들은 결국 결혼식 당일, 말을 타고, 서로를 껴안고, 유성처럼 사라진다.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당신의 발치에 잠들며 당신의 꿈을 지키고 싶다” 고백하던 연인. 골수에까지 박혀버린 화살. 사랑이라는 본능과 죽음은 그렇게 가까이 있다. 그리고 안달루시아 사람들은 본능과 죽음, 그 모두에 가까이 있다. 투우와 같은 제의적 죽음. 플라멩코와 같은 광기의 몸짓.

안달루시아의 태양이 불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 온 세상이 숨죽인 채 귀를 기울인다.
안달루시아의 햇빛은 너무도 찬란하고 화려해서,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새들도 귀금속이나 무지개, 혹은 장밋빛 보석처럼 보인다.
-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인상과 풍경』


한여름의 기질을 가진 안달루시아 사람들 속에서, 그토록 찬란한 안달루시아의 태양 아래에서, 나도 모르게 조금은 명랑하고 변덕스러워진 느낌이었다. 이런 곳에 있으면, 무언가 아주 거대하면서도 지극히 사소하고 유쾌하고 탄력있고 질퍽거리지 않는, 그런 좋은 이야기를 쓸 수 있을 것만 같아. 이렇게 빛나는 이미지와 언어들을 건지러 언젠가 다시 와야지. 좀 더 오래 머물며 수다스러운 친구들을 사귀고, 알람브라에서 길을 잃지도 말아야지.

스페인 남부를 떠나는 길. 사막처럼 황량하기 그지없는 11월의 들판을 바라보며, 문득 하룻밤의 꿈에서 깨어난 듯했다. 모든 것이 그대로인 것을. 과거는 사라지고 미래는 알 수 없고 현재는 쓸쓸하리니. 그러나 어쩌면, 다시 사랑할 수 있을지도 몰라.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몰라. 떠날 수 있다면. 돌아올 수 있다면. 그것이 내 여행의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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