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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42

10. 석기시대의 돌침대는 어땠을까? (마지막 회) 7만 7,000년 전 현재 남아프리카공화국 콰줄루나탈(KwaZuluNatal)주가 있는 지역에서 살던 현생 인류 호모 사피엔스는 사암 절벽에 파인 시 부두(Sibudu)동굴에서 기거했다. 이들은 고도로 발달한 두뇌의 소유자로서 아프리카를 벗어나 유럽을 터전으로 삼은 다음에 네안데르탈인을 멸종으로 내몰고 지구의 주인이 되었다. 이들의 혁신적인 발명품 가운데는 물건을 접착하는 데 필요한 풀과 바느질용 바늘이 있었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 침대보를 똑바로 펴는 정도로 침구를 정돈하지만, 초기 호모 사피엔스는 침대를 만들기 위해 나뭇잎과 골풀을 모아 일일이 손으로 꿰맸을 가능성이 크다. 고고학자들은 동굴 안에서 1인치(약 2.54센티미터) 두께의 식물성 매트리스와 그 안에 있던 석제 도구, 불에 그슬린 뼈, 동.. 2022. 8. 21.
09. 황금빛 미소를 위한 치과 시술 우리는 실수로 유리문에 부딪힌다거나 해서 치아가 빠지면 치과의사를 찾아가 의치를 박아달라고 한다. 기원전 700년경 역사상 최초로 의치라는 묘안을 생각해 내고 실행에 옮긴 사람은 (이탈리아 북부의 농경인인) 에트루리아인이었다. 이들은 이가 빠진 곳에 의치를 박거나 흔들리는 치아를 고정하는 기법을 고안했다. 인접한 건치에 상태가 좋지 못한 치아를 고정하기 위해 납작하게 편 금박이 교정용 브라켓(교정 시 치아 표면에 부착하는 물체)을 사용했는데, 브라켓은 럭비에서 나 같은 약골을 맨 앞줄에 붙들어 맬 때 쓰는 밧줄 같은 역할을 한다. 에트루리아인은 치아가 빠지고 없으면 황소의 이빨을 뽑아 가운데를 송곳으로 뚫고 금속 브라켓에 고정한 다음에 빈 공간에 딱 맞게 박아 넣었다. 금속성 미소하면 007 제임스 본드.. 2022. 8. 20.
08. 연금술과 '생명의 물' 알코올은 안티몬 황화물로 만드는 검은색 화장용 가루라는 뜻의 아랍어 알콜(al-kohl)에서 유래했다. 술의 원료는 중금속이 아니고, 이슬람교 신도는 술을 마시지 않기 때문에 어째서 그러한 단어가 술을 의미하게 되었는지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더욱이 ‘알코올’은 18세기 이전만 해도 기분 전환용 음료를 나타내는 단어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알코올은 어쩌다 술을 나타내게 된 것일까? 모든 일은 일단 연금술이라는 매혹적이고 신기한 분야에서 비롯되었다. 연금술은 한층 고차원적인 지식과 마술적인 힘을 얻기 위해 과학, 종교, 철학을 혼합한 중세의 지식 운동이다. 연금술사는 대부분 영원한 젊음의 묘약이나 철학자의 돌을 얻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므로 의심할 여지 없이 높은 지성을 갖춘 사람이었지만, 현대인의 눈으.. 2022. 8. 19.
07. 식전에 치르는 의식 식탁에 앉은 모든 사람에게 전채를 내고 나서 우리는 자리에 앉아 식사를 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면 넘치는 음식물을 받은 데 대해 감사의 말을 하기 전까지는 빵부스러기 하나도 입에 넣지 않을 것이다. 기독교 신자들은 대부분 (전통적으로 영국인은 그렇지 않지만) 식사를 하기 직전에 전지전능한 신에게 짧고 간단한 감사 기도를 올린다. 힌두교 신자도 비슷한 식전 기도를 올리는 반면에 유대인은 식사를 하고 나서 비르카트 하마존(Birkat Hamazon)이라는 기도를 드린다. 이슬람교 신자는 식전 기도문인 비스밀라(Bismillah: 신의 이름으로)와 식후 기도문인 알함둘릴라(Alhamdulillah: 신에게 찬양을)라는 이중 장치로 만전을 기한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점은 중세 이슬람교 신자.. 2022. 8. 18.
06. 거품이 이는 '악마의 술' 샴페인과 관련하여 재미있는 일화를 한 가지 소개한다. 1693년 8월 4일 베네딕도 수도회의 나이 지긋한 수사 돔 피에르 페리뇽(Dom Pierre Perignon)이 오빌리에(Hautvilliers) 수도원의 양조장에서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서 있었다. 페리뇽은 들뜬 목소리로 동료 수사들에게 양조장으로 오라고 외쳤다. “빨리 와보게! 나는 지금 별을 마시고 있네!” 페리뇽이 흥분한 것도 당연하다. 몇 년 동안 시행착오를 되풀이한 끝에 드디어 거품이 이는 술의 양조 비법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흥미로운 일화는 실화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 페리뇽이라는 수사가 거품 이는 백포도주를 발명했다는 생각은 19세기에 날조된 마케팅 신화라고 한다. 사실 세계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술인 삼페인은 우연한.. 2022. 8. 17.
05. 혁명가들의 바지 19세기 초반까지 무릎까지 오는 반바지가 지배적이었다. 그렇다면 긴 바지는 어떻게 해서 20세기 들어 다시 서구에서 유행하기 시작했을까? 1789년 프랑스혁명의 주동자들이야말로 가장 먼저 긴 바지를 입기 시작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화려한 줄무늬가 들어가고 발목까지 오는 바지를 입었던 이들은 ‘상퀼로트 (sans-culottes: 반바지를 입지 않는 사람들)’로 불렸다. 놀랍게도 줄무늬는 역사를 통틀어 부정적인 함의를 띠었다. 구약성서 의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지며( 19장 19절)”라는 구절 때문인지 중세에는 줄무늬가 금기시되었다. 결과적으로 줄무늬 옷은 나병 환자, 사생아, 사형 집행인 등 소외계층만이 입었다. 20세기에 들어서까지 서구 각국이 재소자에게 줄무늬 죄수복을 입혔던 것도 우연의 .. 2022. 8. 16.
04. 어떻게 늑대가 개로 변신했을까? 석기시대에 호모 사피엔스의 등장으로 거대 육상동물 가운데 85퍼센트 정도가 멸종된 것으로 보인다. 거대 나무늘보, 거대 웜뱃(wombat), 거대 캥거루, 그리고 매머드급 매머드가 사라졌다. 그런데 심장이 뛰는 존재라면 닥치는 대로 죽여 없앴던 석기시대 선조가 일부 동물을 살려주고 반려동물로 삼았던 까닭은 무엇일까? 그 까닭은 인류의 가장 오랜 친구인 개가 사냥꾼과 파수꾼이라는 두가지 역할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벨기에의 고예(Goyet) 동굴에서 발견된 동물 뼈는 과학적 측정을 통해 3만 1,700년 전 것으로 추정되는데, DNA 분석을 통해 의도적인 번식 계획의 산물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늑대 뼈는 아니었으니 뼈의 주인은 가장 초기 버전의 개였음이 분명하다. 우리가 운동화를 신고 뒤편 베란.. 2022. 8. 15.
03. 비누 전쟁 머리를 감으면서 가사에 혼이 실린 ‘난 괜찮아(I’ll Survive)’를 열창한 다음에는 과일향이 나는 몸 전용 세척제를 피부에 바르고 물로 씻어 때를 없앤다. 그러고는 구아바 농축 에센스로 마무리한다. 이것은 대충 보더라도 현대인의 목욕 방식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청동기 이후로 대부분의 사람이 사용한 세척제는 약초나 재와 동물 지방으로 만든 비누가 고작이었다. 실제로 고대 지중해 문화권에서는 ‘비누’란 단어가 켈트인이 머리 염색에 썼던 약초와 동의어였다. 로마인과 그리스인은 태운 재나 동물 지방 대신 기름을 바르고 잠시 후에 긁어내어 때를 제거했다. 올리브유로 만든 단단한 비누는 중세 이슬람 문화권의 발명품이며, 무어인이 지배하던 스페인 카스티야(Castilla)를 통해 유럽의 다른 국가로 전파되.. 2022. 8. 14.
02. 감자는 악마의 음식이었다? 경비병들이 무기를 손에 쥔 채 밭 가장자리에 버티고 선 가운데 현지 농부들이 경비병들 너머에 있는 밭을 유심히 살피며 대체 얼마만큼 귀하고 값비싼 작물이 흙을 뚫고 싹을 틔웠는지 감을 잡으려고 애쓴다. 호기심이 불붙은 농부들은 참을성 있게 땅거미가 지기만을 기다리다가 밤이 되어 경비병들이 병영으로 복귀하는 모습을 보고 환호한다. 보초를 서는 사람들이 사라지자 농부들이 막무가내로 밭으로 달려가더니 달빛을 받으며 작물을 파내고는 살그머니 그 작물을 자기 밭으로 옮겨 심는다.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 귀족 식품은 자기들이 처음으로 맛보게 될 터였다. 한 편의 연극 같은 절도 행위를 전해 들은 밭 주인은 흡족한 미소를 띤다. 그의 교활한 계획이 멋지게 성공한 것이다. 냉동 해시 브라운스(hash browns.. 2022. 8. 13.
01. 로마시대 엽기적인 공중변소 로마의 공중변소인 포리카(forica)에서는 남녀가 내외도 하지 않고 긴 벤치에 앉아 점잖게 잡담을 하면서 대변을 보았다. 그 아래로는 하수도가 흐르고 있었다. 영국인답게 지하철에서 시선이 마주치는 것조차 못 견뎌 하는 나로서는 생각만으로도 괴롭고 소름 끼치는 상황이다. 그러나 로마인은 분명 거리낌이 없었다. 수도 로마에만 엉덩이를 나란히 하고 앉는 공중변소가 144개에 이르렀으며, 로마제국의 다른 지역에도 수없이 많은 공중변소가 생겨났다. 현재 시리아의 영토인 아파메아(Apamea)에는 한 번에 약 8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초대형 변소가 있었다. 그러나 공중변소 대부분은 정원이 12명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포리카 한 귀퉁이에는 세면기와 부드럽게 물줄기를 뿜어내는 분수가 설치되었으며, 바닥 가장자리를.. 2022. 8. 12.
06. 남북전쟁 시기, 흑인 아이들을 백인을 위한 백신 배양 도구로 썼다. (마지막 회) 노예해방을 부르짖던 남북전쟁 시기, 의사들은 흑인 아이들을 백인을 위한 천연두 백신 배양 도구로 썼다 아이는 아마도 울고 있었을 것이다. 감독관이 아이를 찾으러 왔을 때 엄마는 아이의 손을 잡고 오두막을 나와 목화밭에서 멀리 떨어진 빈터 나무 아래, 두 명의 백인 남자가 서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백인 중 하나인 노예 소유주는 아이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겠지만, 몸값만은 쉽게 매겼을 것이다. 다른 한 명인 백인 의사도 자신이 하려는 치료가 효과가 있을지 확신하지 못해 안절부절못했을지 모른다. 어쩌면 의심도 저항도 없었을지 모른다. 남북전쟁은 이미 발발했고 예상치 못한 적이 출현한 상태였다. 질병이었다. 그랬다면 아이의 엄마는 의사의 치료가 보이지 않는 적들로부터 아이와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이라 믿고 소리를.. 2022. 7. 18.
05.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흰색 간호복 너머 숨겨진 질병 역학의 개척자 코흐는 자신의 연구업적으로 인정받았지만, 나이팅게일은 역학자라기보다 크림전쟁 당시 “등불을 든 여인”으로 대중에게 더 많이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나이팅게일이 병원에서 간호사로 환자들을 돌본 시간은 매우 짧았다. 나이팅게일은 간호사로서보다 질병 전파에 관해 연구하고, 토론하고, 분석하고, 보고서를 쓰는 데 자신의 경력대부분을 할애했다. 나이팅게일의 이런 활동이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뭘까? 과학지식의 발전이 일반적으로 유럽 백인 남성들에 의해 이뤄진다는 통념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과학지식 발전이 스쿠타리의 야전병원에서 일하거나 인도 주재 영국군과 인도 전역에 대해 침실에서 분석한 여성에 의해 이뤄진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지식생산에 관한 대중의 고정관념은 나이팅게일의 연구 활동을 가리고, 그를 역학자가 .. 2022. 7. 17.
00. <소소한 일상의 대단한 역사> 연재 예고 하루 일과로 보는 100만 년 시간 여행 역사의 앞뒤를 가리지 않고 샅샅이 뒤져 밝혀낸 기막히게 흥미롭고 때로는 어리석은 일상! 역사 속의 다양한 스토리를 발굴하여 소개하는 영국의 역사평론가 그레그 제너의 『소소한 일상의 대단한 역사』. 100만 년 동안 형성된 우리의 평범한 일상 속에 숨어 있는 이야기 가운데 우리가 늘 궁금하게 생각했던 일이나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기상천외한 이야기들을 캐내어 흥미진진하게 들려준다. 시간은 수백만 년 동안 그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고 멈춤 없이 흐르고 우리는 초, 분, 시간, 일, 주, 월, 년 등 표준화된 단위로 시간을 엄격하게 구분하지만, 이것은 혼돈을 피하고자 인간이 수세기에 걸쳐 사용해온 약속이자 관례일 뿐이다. 1793년 혁명의 소용돌이에서 프랑스를 장악.. 2022. 7. 15.
04. 식민지의 세탁부, 전염병 연구에 핵심 역할을 했으나 역사에서 누락되었다. 식민지의 세탁부, 무슬림 순례자, 노예, 빈민…, 전염병 연구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나 역사에서 누락된 사람들 우리는 1830년대에 전염병이 창궐했던 알렉산드리아 같은 도시들로부터 지중해 몰타 섬으로 여행을 와 격리된 사람들의 더러운 리넨(옷, 침대시트, 수건 등)을 빨았던 세탁부가 누구였는지 모른다. 다만 그 세탁부가 당시 영국이 지배하던 몰타의 수도 발레타에 살았다는 것은 안다.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공원 근처에서 살았을 것이다. 지중해 해상교통의 요충지인 몰타에 정박하는 배를 탔던 승객들은 유럽으로 건너가기 전에 몰타에서 격리돼 검역을 거쳐야 했다. 흑사병에 걸린 적이 있거나 걸렸을 것이라고 의심되는 승객들은 “불완전건강증명서(foul bill of health)”를 받고 오랫동안 격리 수용됐다. 선.. 2022. 7. 15.
03. 노예선에서 죽어간 수많은 노예들 덕에 위생관념에 눈을 떴다. 노예선에서 죽어간 수많은 노예들 덕에 의사들은 환기의 중요성을 새삼 인식하고 위생관념에 눈을 떴다 트로터는 브룩스 호의 아프리카인 노예 관찰에 의존해 연구를 했음에도 막상 논문을 발표할 때는 서론에서 “수많은 사례”라는 표현으로 뭉뚱그렸다. 이 표현은 경험적 관찰에 의존했음을 강조함으로써 연구에 적합성을 부여하지만, “수많은 사례” 대부분이 사실 아프리카인 노예 관찰임을 숨기기 위한 방편이었다. 동료 의사들을 독자로 하는 논문을 쓰면서 트로터는 노예선 바닥의 상태가 어떻게 건강에 안 좋은 환경을 만들었는지, 자신이 그 환경을 어떻게 분석해 괴혈병의 원인, 치료법, 예방법에 대한 이론을 만들어냈는지에 대해서는 숨기는 의학용어를 사용한 것이다. 그 결과, 새로운 과학 지식의 발견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아프.. 2022. 7. 14.
02. 군의관인 그의 임무는 노예들을 건강한 상품으로 목적지까지 운반하는 것이었다. 군의관인 그의 임무는 노예상들의 수익원인 노예들을 건강한 상품으로 최종 목적지까지 운반하는 것이었다 1784년 4월, 아프리카를 출발한 지 3개월 만에 7~8명이 사망했다. 트로터는 괴혈병에 걸린 아프리카인 노예의 수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며 “아침에 사망한 채 발견된 노예들도 있고, 갑판으로 올라오자마자 쓰러져 사망한 노예들도 있었다. 음식을 먹는 동안 사망한 노예도 있었다”고 썼다. 브룩스 호가 카리브해에 가까워질 무렵 40명의 사망자가 더 발생했다. 트로터는 카리브해에 살아서 도착한 약 600명의 아프리카인 노예 중에서 300명이 괴혈병 증상을 나타냈다고 썼다. 자신이 관찰했던 다른 괴혈병 환자들처럼 아프리카인들 역시 산성 음식에 대해 강한 욕구를 보인다는 것을 알아챈 트로터는 항해 중 아프리카인들의.. 2022. 7. 12.
01. 한 노예가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며 죽었다. 한 노예가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며 죽었다, 수십 년 뒤 그의 죽음은 인간이 먹지 않고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로 활용됐다 아프리카 대륙 서부해안에서 출발한 배는 하루가 넘게 항해하고 있었다. 그가 들을 수 있는 소리라고는 어떤 남자가 외국어로 말하는 것뿐이었다. 파도가 선체에 부딪히고, 갑판 아래쪽에서는 고통스러운 신음이 올라오고 있었다. 배는 바람을 타고 아메리카 쪽으로 움직였다. 눈에 보이는 것은 하늘밖에 없었다. 그는 얼마 전 족장과 언쟁을 벌였다. 족장은 복수를 위해 그에게 사술을 행한다는 혐의를 씌워 온 가족을 노예로 팔아버렸고, 그의 가족은 졸지에 고향인 가나에서 신세계로 쫓겨나는 신세가 됐다. 그는 이런 자신의 운명을 거부했다. 그래서 그는 배의 선원들이 노예들에게 콩죽, 쌀,.. 2022. 7. 11.
00. <제국주의와 전염병> 연재 예고 제국주의, 노예제, 전쟁은 의학을 어떻게 바꾸었을까? “현재 우리의 건강은 이름 없는 조상들의 피와 고통에 너무나 많은 것을 빚지고 있다.” 의학은 18~19세기에 광폭으로 발전했다. 번성하는 제국주의의 관료체계 덕에 전 세계로 파견된 의사들은 시시각각 닥치는 의학적 위기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연구자로 변모했다. 넘치는 열정으로 유행병을 관찰하고, 감염자와 사망자 수를 세고, 주변 환경과 질병의 상관관계를 분석했던 그들은 동료들과 열띤 토론을 벌이며 혁신적인 이론과 치료법을 개발해냈다. 사례연구와 통계분석에 근거해 질병의 양상을 규명하는 역학疫學 역시 이 시기에 탄생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공중보건의 시대가 첫발을 뗀 것이다.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그 시기 의사들이 대규모 임상을 진행하고, 예후를 관.. 2022. 7. 8.
06. 유신정권과 개발독재가 낳은 괴물 (마지막 회) 만들어진 ‘무등산 타잔’, 박흥숙 가난한 독학생이 잔혹한 살인범으로 박흥숙(朴興塾, 1957~1980)은 1977년 4월 20일 광주 무등산 덕산골에서 쇠망치로 사내 넷을 죽였다. 살해당한 이들은 무등산 일대의 무허가 주택을 철거하고자 나온 광주시 동구청 건축과 녹지계소속 철거반원들이었다. 출동한 철거반원 일곱 명 중 일찌감치 빠져나간 한 명을 제외하고 여섯 명을 모조리 때려죽이려 했다. 박흥숙은 살인 및 살인미수 혐의로 1977년 9월 일심 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다. 이후 고등법원에서도 항소는 기각됐고 대법원 역시 원심을 받아들여 사형이 확정됐다. 광주교도소에서 3년동안 수감 생활을 하다 1980년 12월 24일 형 집행을 당했다.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그해 겨울 광주에서 일어난 최초의 사형 집.. 2022. 6. 15.
05. 유토피아를 꿈꾼 사회주의자의 선택적 기억법 한국 최초의 정부 공식 문화인, 정연규 추방된 식민지 조선인 작가, 문화인으로 부활하다 1962년 6월 26일 서울시 교육국 문화과는 문화예술인들의 관리와 지원을 위한 목적으로 공식 문화인 등록 사업을 시작한다. 신문 보도에 의하면 이때 소설가 김동리와 화가 김환기를 제치고 제1호로 등록한 사람은 2년 전 1960년 10월 25일 일본에서 귀국한 정연규(당시 나이 62세)였다. 정연규(鄭然圭, 1899~1979)는 문교부 명령에 따라 서울시가 ‘문화인 등록’을 개시한 첫날 서울시청을 방문해 증명사진 두 장을 제출하며 예술인 등록원부에 “1922년 11월 『혼(魂)』, 『이상촌(理想村)』등 배일(排日) 소설을 썼다가 일본으로 추방되었으며 그밖에 일본에서 『정처 없는 하늘(さすらひの空)』 등을 썼다”고 밝혔.. 2022. 6. 14.
04. 중늙은이 나이, 비행기에 인생을 건 사나이 조선 최초의 비행사, 서왈보 늦깎이에서 최초의 비행사로 동급생들이 모두 스무 살뿐인 학교에 서른넷 나이로 입학한 사람이 있다면 어떤 평가를 받을까. 대기만성?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드림헌터? 아니다. 주변의 친절한 간섭꾼들은 아마 도시락을 싸 들고 쫒아 다니며 입학을 만류하고 하던 일이나 계속하라고 조언할 것이다. 아무리 하고 싶은 게 있더라도 서른네 살에 입학이라니……. 더구나 조혼 풍습이 남아 있어, 마흔이 되면 손주 보는 일도 흔했던 1920년대에 말이다. 그 시절 30대 중반의 나이는 지금과 사회적 무게부터 사뭇 달랐다. 그런데 중늙은이 취급을 받는 나이에 비행사의 꿈을 향해 과감히 도전을 실행한 사람이 있었다. 인생의 ‘리셋’ 버튼을 과감하게 눌러보고 싶은 순간은 하루에도 몇 번씩 찾아온다. 하.. 2022. 6. 13.
03. 크리스마스 씰의 기원이 된 조선 최초 여의사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 김점동 “저를 난로에 집어넣지 마세요”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처음으로 스크랜튼 부인을 만났을 때, 어린 소녀는 겁을 잔뜩 집어먹고 있었다. 구한말인 1885년 아홉 살 된 조선인 소녀에게 생전 처음 본 외국인 선생은 너무나 낯선 존재였다. 조선인과 다르게 생겨,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사용하는 서양인은 무섭고 기괴하게만 보였다. 선교사이자 교육자였던 스크랜튼(Mary F. Scranton) 부인이 미소를 띠며 어린 소녀에게 난로 가까이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하지만 소녀는 덩치 큰 서양 여자가 자신을 붙잡아 난로 속 뜨거운 불구덩이로 던져 넣을 것만 같았다. “저를 난로에 집어넣지 마세요.” 소녀는 아버지 손을 꼭 붙잡은 채로 뒤로 한 발짝 물러서며 몸서리쳤다. 소녀가 서양식 난로.. 2022. 6. 12.
02. 3.1 운동이 배출한 최고의 ‘아웃풋’ 관상용 꽃이 되길 거부한 열혈 독립운동가, 정칠성 수많은 사람의 인생을 바꾼 3.1 운동 ‘3.1 운동’은 실패한 거사였다. 기획 주체에서 행동 단위로 이어지는 치밀한 각본이 마련된 체계 잡힌 운동이 아니었다. 일제의 억압에 분노한 수많은 군중이 저마다의 정념을 폭발시킨 ‘종잡을 수없는 운동’의 성격이 강했다. 고종의 인산(因山)을 애도하는 노인들과 국외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에 고무된 학생들, 지주에게 고리를 뜯겨 화가 난 소작농, 일자리를 빼앗긴 노동자, 주재소의 일제 경찰에게 얻어맞은 무지렁이, 시끌벅적한 광장을 지나칠 수 없었던 혈기 왕성한 청년들까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중구난방’과 ‘좌충우돌’은 당연했다. 만세 운동은 결국 일제 경찰에 의해 진압됐다. 민족이 염원.. 2022. 6. 10.
01.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간 가장 낮은 자 한국 최초의 고공투쟁 노동자, 강주룡 ‘해고자’와 ‘철거민’, ‘장애인’과 ‘난민’ 같은 이들은 때때로 가장 높은 곳에 오른다. ‘크레인’과 ‘공장 굴뚝’, ‘송전탑’, ‘건물 옥상’, ‘한강 다리’ 등이 바로 그곳이다. 억울하고 분한 일이 해결되지 않고 앞이보이지 않을 때, 높은 곳에 올라가야만 비로소 세상 사람들이 눈길을 보내고 귀를 기울여주기 때문이다. ‘가장 높은 곳’에 ‘가장 낮은 자’들이 올라가게 된 까닭이다.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운 고공농성은 보통 사회적 약자들이 목숨을 걸고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투쟁 방법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고공농성’을 한 사람은 일제강점기 여성노동자 강주룡(姜周龍, 1901~1931)이다. 그녀는 평양 ‘평원고무공장’ 여공이었다. 1931년 5월 29일 강주룡.. 2022. 6. 9.
00. <역사에 불꽃처럼 맞선 자들> 연재 예고 새로운 세상을 꿈꾼 25명의 20세기 한국사 무엇이 그들을 싸우게 만들었는가 정세가 급격하게 움직이고 또 수없이 다른 방향이나 상태로 바뀔 때, 자연스럽게 휩쓸리거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좇거나 발맞추는 건 어렵지 않다. 성공과 풍요가 절로 따라올 테니 말이다. 하지만, 치트키를 쓰지 않고도 인생을 하얗게 불태우며 공동체를 위해 자신을 내던져 싸운 존재들도 있다. 그들은 비록 쉽게 잊혔지만 누구보다 어려운 길을 걸었다. 20세기 한국사에서 이들 존재는 숨겨졌고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거대한 세계 질서에서 빗겨나 세상에 순응하지 않는 견해를 드러내길 주저하지 않고 체제를 비판·위협·파괴하는 데 특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형화된 근현대 한국 사회에 드라마틱한 삶을 산 이들의 자리는 없었다. 이 책은 말한다,.. 2022. 6. 8.
05. 밀 때문에 나선 러시아원정 (마지막 회) 근대 유럽의 역사에서 밀과 관련된 무역 때문에 전쟁까지 벌어진 경우도 있었는데,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원정이 그것이다.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은 1806년 11월 21일, 대륙봉쇄령을 발표했다. 이 대륙봉쇄령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유럽의 모든 나라는 영국에 어떤 상품도 팔거나 어떤 영국 상품도 사지 말라”는 것이었다. 나폴레옹이 이런 대륙봉쇄령을 발표한 것은 영국 때문이었다. 대륙봉쇄령을 발동할 무렵 유럽에서 나폴레옹에게 맞설 적수는 영국밖에 없었다. 나폴레옹은 영국을 군사력으로 제압하기가 불가능했다. 영국은 유럽 본토와 육지로 연결된 나라가 아니라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나라여서 영국을 정복하려면 해군이 필요했다. 문제는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나자 프랑스 해군의 장군과 장교를 이루고 .. 2022. 6. 3.
04. 후추를 얻기 위한 모험과 전쟁 십자군전쟁보다 훨씬 이른 시기부터 유럽 사람들은 후추의 원산지인 인도를 동경하며 가고 싶어했다. 서기 600년대 유럽 사람들은 인도의 후추나무는 사나운 뱀들이 지키고 있어서 후추를 가지러 온 사람을 물어 죽이며, 후추를 수확하려면 후추나무에 불을 질러 뱀들을 쫓아내야 하고, 그래서 후추가 검은색이라고 여겼다. 이는 후추에 대한 그들의 무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왜곡된 이미지를 통해서라도 그들이 후추를 얼마나 갖고 싶어했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유럽 사람들의 열망에 불을 지핀 책이 13세기 말엽 중국 원나라에 다녀왔던 여행가이자 상인 마르코 폴로의 회고록 《동방견문록》이었다. 이 책에서 마르코 폴로는 중국 남부의 항구 도시인 항저우에 매일 10만 파운드 무게의 후추가 무역선에 실려 들어오며, 그 양은 인도에서.. 2022. 6. 2.
03. 염전 싸움에서 혁명으로 소금의 수출이 나라를 부유하게 했다면, 소금의 수출이 막힐 경우 나라가 망할 수도 있었다. 16세기에 유럽의 최강대국으로 떠올랐다가 17세기에 이르러 국고가 바닥나 파산한 스페인이 그 좋은 사례다. 16세기, 스페인은 오늘날의 네덜란드를 식민지로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스페인인들은 개신교 계통의 칼뱅파를 믿고 있던 네덜란드인들에게 “너희들은 이단인 칼뱅파를 버리고 우리가 믿는 정통 교회인 가톨릭을 믿으라”고 강요하는 바람에 네덜란드에서는 스페인의 지배에 대한 반발심이 높아졌다. 결국 1566년 8월 10일, 네덜란드에서 스페인을 몰아내려는 폭동이 일어났다. 이 폭동은 곧바로 네덜란드와 스페인 사이의 네덜란드 독립전쟁으로 번졌는데, 이 전쟁은 이후 80년 동안 계속되었다. 네덜란드 독립전쟁에서 눈부신 활.. 2022. 6. 1.
02. 흑인 노예들의 역사가 서리다 16세기로 접어들면서 유럽인들은 대서양 서쪽의 아메리카 대륙을 점령해나갔다. 그러면서 점차 늘어난 설탕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대서양의 마데이라제도, 카리브해의 아이티섬과 남미의 브라질을 비롯해 아메리카 지역에 사탕수수 재배 농장을 세웠다. 이 농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주로 아프리카에서 끌고 온 흑인 노예들이었다. 유럽인들은 아메리카 원주민을 붙잡아 노예로 부렸으나, 원주민들은 유럽인이 옮기는 전염병에 약해 많이 죽은 데다가 그들의 고향과 가까운 탓에 걸핏하면 도망치는 식으로 저항했다. 이에 유럽인들은 전염병에 잘 견디면서 도망칠 우려가 없는 먼 아프리카 흑인을 노예로 붙잡아 와서 부리는 방식을 택했다. 대략 1500년에서 1880년까지 최대 4천만 명의 흑인들이 노예선에 탄 채로 아프리카에서 대서양을.. 2022. 5. 31.
01. 이슬람 문화권의 설탕 사랑 설탕은 서기 600년대 후반부터 지중해 세계를 지배한 이슬람제국 시절을 거치면서 본격적으로 대량 생산되기 시작했다. 아랍인들은 설탕을 매우 좋아해, 사탕수수 재배가 가능한 이집트, 페르시아, 시리아, 크레타섬 등지에 설탕 제조 공장을 세웠다. 서기 1천 년 무렵, 아랍인들에 의해 크레타섬의 도시 칸디아(오늘날의 이라클리온)에 대규모로 설탕을 정제하는 공장이 들어섰다. 아랍인들이 지배하는 지역마다 설탕을 생산했는데, 그중에서 가장 좋은 제품은 이집트산으로 여겨졌다. 아마도 나일강을 낀 비옥한 토지로 풍족한 양의 곡식이 생산되는 환경 덕분에 설탕의 맛과 품질도 좋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이 실패한 설탕의 대량 생산을 어떻게 아랍인들이 성공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당시 지중해 지역의.. 2022. 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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