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시·에세이/<아빠의 비밀일기>8

07. 꼰대의 시간은 흐른다. (마지막 회) 몇몇이 모이는 작은 동창 모임에 나갔다. 오래된 기억들을 짜 맞추는 재미를 술안주 삼아 마시고 떠드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갑자기 분위기가 썰렁해진 건 한 동창생이 자신의 딸 이야기를 꺼내면서다. 딸이 사춘기가 되면서 아빠를 대하는 태도가 예전과 달리 냉랭하기 짝이 없고, 무시당하는 것이 괘씸해 죽겠다는 것이다. 그러자 좌중 여기저기서 “너도 그렇다니 다행이다. 우리 애도 그렇다!” 혹은 “그건 약과다. 나는 이런 꼴까지 당하며 산다!”는 피해사례가 앞을 다투어, 추임새처럼 장단을 맞추고 든다.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문제가 점점 커졌다. 말이 위험수위를 넘나드는가 싶더니 듣기 거북한 막말로 흐르고 급기야 옆에서 입을 틀어막기에 이르렀다. 앞뒤가 온전치 않은 지저분한 말들이었다. “아내가 둘째를 원하지.. 2022. 2. 22.
06. 보리차를 끓이며 분리수거를 하려고 집안에 쌓여 있는 재활용 쓰레기를 주섬주섬 챙긴다. 플라스틱 생수병이 너무 많아도 너무 많다. 부피를 줄여보겠다고 찌그러뜨리긴 하는데, 그 정도로는 쓰레기로 몸살을 앓는 지구에 그다지 위로가 될 것 같지 않다. 나도 덩달아 체증에 걸린 듯 마음이 개운치 않다. 크리스 조던이라는 미국의 환경미술가가 있다. 그는 태평양의 미드웨이 제도에 수년간 머물며 사진을 찍고 영상을 만들었다. 그의 다큐멘터리는 인간이 자연을 훼손하고 기만해 온 참담한 현장을 파헤치고 있다. 무분별하게 버려진 플라스틱과 비닐들이 해류를 타고 바다 위를 떠다니다 앨버트로스(Albatross)의 서식지에 고여 생태계를 변질시킨다. 잔혹하고 날카로운 변화의 칼끝이 돌고 돌며 인간을 비롯한 온 지구를 통째로 위협하게 된다. 우.. 2022. 2. 21.
05.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미카엘 중1담임 김정현쌤' 낯익은 발신자 표시를 보고 가슴이 철렁한다. 디딘 바닥이 일순간에 저 시꺼먼 아래로 꺼져 내리는 기분. 너무나 고맙지만, 결코 반갑지 않은 그가 날 찾고 있다. 살다 보면 그런 존재, 그런 관계, 그런 상황들이 있지 않던가. 불길한 예감이 실려 집어 드는 핸드폰이 무겁다. 선생님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의연하고 차분했다. 한 학년 내내 줄기차게 선생님을 괴롭혔던 말썽쟁이가 또 사고를 쳤다. 나는 습관처럼 죄인 된 심정으로 머리를 조아리며 용건을 전해 듣는다. 이번 사건은 같은 반 친구랑 벌인 주먹다짐이다. 서로 조금씩 다쳤으나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고, 사려 깊은 선생님은 학부모 안심시키기를 빠뜨리지 않는다. 둘을 데리고 막 병원으로 출발하려는 참인데 올 수 있겠느냐고 묻는.. 2022. 2. 19.
04. 보이후드 영화 는 로 익숙한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작품이다. 2015년 1월 신촌의 작은 극장을 홀로 찾아 처음 이 영화를 보았다. 오전 첫 회차인 조조 상영이라 관객은 두엇뿐이었다. 바깥이나 극장 안이나, 날씨도 분위기도 을씨년스럽기가 하나같았다. 그러나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 세상은 두 시간 전에 비해 훨씬 푸근했다. 마음 한편에 보드랍고 말랑한 감정들이 몽글몽글 덩이지는 걸 느꼈다. 독특하고 새로웠다. 새해 벽두였지만 조급하게도 나는 확신하고 있었다. 올해 최고의 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먼 훗날 인생영화를 꼽더라도 가뿐하게 베스트10 안에 들지 않을까! 한두 달 동안은 만나는 사람들 모두에게 이 영화를 꼭 봐야 한다며 영업을 하고 다녔다. 는 평단으로부터 받아 낸 융단 호평으로도 유명하다. 한 영화평론가.. 2022. 2. 18.
03. 순수의 기원 열다섯 살, 말 안 들어 먹는 건 국가대표급이고 갈수록 제멋대로이기만 한 사춘기 소녀 로사. 그런 로사를 아직도 아빠는 가끔 “아가야!”라 부른다. 언젠가 혹자 하나는 그걸 듣고는 지청구를 놓았다. “아니, 얘가 어떻게 아직도 아가야?” 모르는 소리 하고 있다. 경솔하게 입 밖에 내서 좋을 게 없는, 그야말로 모르는 소리다. 딸이 없어 불행한 자가 요량 없이 뇌까린 말에 대꾸는 해서 무엇 하나. 대체 나이가 무슨 소용? 아빠에게 딸내미의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영원한 아가가 있다는 기쁨을 어찌 말로 다 설명할 수가 있을까! 가족 내부에서도 민원이 접수된 적이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미카엘 군의 의견이었다. “로사가 지금 몇 살인데 아직도 아가라고 불러요?” 여동생이 여전히 아가인들 오빠로서 별 손해 볼 .. 2022. 2. 17.
02. 너와 나의 평행이론 할머니와 나 어렸을 때 나는 할머니와 같이 방을 썼다. 젊어서 혼자가 된 할머니는 서울의 큰아들 집과 순천의 작은아들 집을 육 개월에서 일 년씩, 여행하듯 번갈아 다니시며 노후를 보냈다. 희고 고운 얼굴을 가진 할머니와 나를 보면서 사람들은 둘이 많이 닮았다고 했다. 그땐 그 말을 잘 이해할 수 없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무슨 말인지 알아갔다. 거울 속 어딘가에는 돌아가신 그의 얼굴이 어렴풋이 함께 있다. 할머니는 기다란 곰방대에 봉초 담배를 다져 넣어 피웠는데, 담배 찌꺼기와 냄새에 불평하는 어린 손자와 티격태격도 꽤 했다. 손자들이 말을 듣지 않을 때면 가끔 곰방대를 들어 “이 망할 놈!” 하셨지만 진짜로 때린 적은 없다. 할머니는 한쪽 다리가 불편했다. 지팡이는 외출의 필수품이었고, 막둥이인 내가 그.. 2022. 2. 16.
01. 미국아빠 판타지 미국 영화에서 종종 발견되는 클리셰 하나. 아빠와 캐치볼 또는 플라이낚시를 하던 아이가 얼굴을 바로 쪼는 햇볕에 눈을 찡그리며 질문을 던진다. 배경이 미국이고 영화의 한 장면인 만큼 “나 오늘 학원 안 가면 안 돼요?” 같은 질문이 아니다. 눈치 빠른 관객이라면 여기가 바로 작가나 연출자가 힘주고 있는 대목임을 감지한다. 영화의 도입부 어딘가에는 관객에게 의미심장한 동기나 암시를 주려고 고심한 흔적이 꼭 있기 때문이다. 아이가 건넨 질문은 아마도 그 물음 자체로도 다양한 상상을 유발할 수 있고, 적당히 추상적이면서 복합적일 확률이 높다. 미국 아빠들은 이때를 허투루 낭비하지 않는다.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려 왔다는 듯 나긋한 목소리, 온화한 눈빛으로 필요한 대답을 들려준다. 절묘한 은유와 심오한 함축의 언.. 2022. 2. 15.
00. <아빠의 비밀일기> 연재 예고 싱글대디 좌충우돌 성장에세이 ‘이 미숙한 것들한테 어떻게 세상을 맡기나?’ 걱정이 태산 같을지 모르나 천만의 말씀이다. 자고이래 세상은 늘 젊은이들의 것이었다. 깔고 앉은 자리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새로운 임자에게 제때 비켜주지 못하는 자를 일컬어 세상은 꼰대라고 부른다. 변화의 흐름에 올라타지 못하면 자기만 외롭고 힘들다. 시간을 조금이라도 붙잡고 늦추고자 한다면 끊임없이 학습하고 적응하는 방법밖에 없다. 내게 미래란 낭만적인 것만은 아니다. 꿈꾸는 내일임과 동시에 받아들이고 적응해야 하는 숙제이기도 하다. - 본문 「꼰대의 시간은 흐른다」 중에서 ‘아이라는 선물’을 받은 젊은 아빠의 한없이 신기하고 벅찬 감정으로 책은 시작된다. 그러다 어느새 사춘기 아이들의 질풍노도에 하릴없이 나부끼는 고단한 중년.. 2022. 2. 14.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