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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세이/<아빠의 비밀일기>

05.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by BOOKCAST 2022.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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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엘 중1담임 김정현쌤'
 
낯익은 발신자 표시를 보고 가슴이 철렁한다. 디딘 바닥이 일순간에 저 시꺼먼 아래로 꺼져 내리는 기분. 너무나 고맙지만, 결코 반갑지 않은 그가 날 찾고 있다. 살다 보면 그런 존재, 그런 관계, 그런 상황들이 있지 않던가. 불길한 예감이 실려 집어 드는 핸드폰이 무겁다.
 
선생님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의연하고 차분했다. 한 학년 내내 줄기차게 선생님을 괴롭혔던 말썽쟁이가 또 사고를 쳤다. 나는 습관처럼 죄인 된 심정으로 머리를 조아리며 용건을 전해 듣는다.
 
이번 사건은 같은 반 친구랑 벌인 주먹다짐이다. 서로 조금씩 다쳤으나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고, 사려 깊은 선생님은 학부모 안심시키기를 빠뜨리지 않는다. 둘을 데리고 막 병원으로 출발하려는 참인데 올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이유를 대며 거절하거나 느긋할 재간이 없는 입장이다.
 
종합병원의 신경외과 진료대기석에 선생님과 미카엘이 앉아 있다. 선생님께 깊은 유감과 미안함, 그리고 고마움이 뒤섞인 두서없는 인사를 건넨다. 상대편 친구인 찬희는 먼저 진료를 받고 있었다. 무얼 하던 중에 싸움이 나서 연행돼 온 건지, 미카엘은 제 것도 아닌 (볼펜 글씨로 용석이꺼라 적힌)체육복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이었다. 눈에 띄는 부상은 아닌 것으로 보여 일단 한숨 돌리게 되자, 다친 아이를 수습하러 달려온 보호자란 사실을 잠시 깜박한 채 나는 잔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이 바지는 못 보던 바지네. 교복 바지는 어떡한 거야? 체육 시간이라 빌려 입었다고? 이 추운 날씨에 빌려 입은 게 하필 반바지냐. 체육이 든 날은 미리 잘 챙겨둘 것이지."
 
그러다 이게 지금 처지에 할 만한 대화가 아니구나 싶어 선생님 눈치를 살폈다. 둘 다 크게 다친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병원에 가보는 게 좋겠다는 보건교사의 전언을 듣고 데리고 오게 됐다고.
 
곧 찬희가 진료실에서 나왔다. 보호자는 아이의 큰아빠였다. 가벼운 인사를 주고받은 뒤 찬희네는 주사실로, 미카엘놈과 나는 진료실로 들어갔다. 의사가 괜찮냐, 어지럽지 않으냐?” 물었고, 미카엘은 지금은 좀 나아졌는데 막 싸우고 났을 때는 어지러웠다라며 어물쩍 대답했다. 의사는 CT 촬영을 해보자 했다. 돈 낭비일 것이 뻔했으나 분위기에 휩쓸려 촬영을 했다. 역시나 별것은 없었다.

미카엘은 찬희를 깐족깐족 놀려대다가 화가 폭발한 찬희에게 헤드록을 당했다. 몸부림치는 과정에서 찬희의 얼굴과 목을 할퀴었고, 찬희도 질세라 미카엘의 머리통을 여러 차례 가격. 이것이 이날 쌍방폭행 사건의 전모다.
 
옛날이야기를 할 것 같으면 사내아이들의 이 정도 쌈박질은 하찮은 일로 치부하고 지나칠 일이다. 그러나 요즘 학교에서는 사고 처리를 그렇게 대충해선 안 된다고. 작은 사고가 생기더라도 만일을 대비해 병원에 가보는 것도 맞고, 부모에게 알리는 것도 맞다.
 
정말이지 미카엘을 통해 새삼 뼈에 사무치게 느끼고 있다. 이 시대 한국 땅의 선생님이라는 직업 앞에 펼쳐지는 어마어마한 고난에 대해서 말이다. 나는 진심으로 미카엘의 담임선생님을 존경한다. 나보다 이십 년 가까이 젊지만, 그는 나 같은 사람이 절대 할 수 없는 일을 해내고 있는 훌륭한 사람이다.
 
보호자 둘과 선생님, 그리고 싸움꾼 둘. 다섯 사람은 병원 로비의 카페로 자리를 옮겨 둘러앉았다. 모두 발언자는 찬희의 큰아빠였다. 그는 호인이었고 이미 노련하게 상황 파악을 끝낸 상태였으며 답을 알고 있었다.
 
아이들은 다 이러면서 크는 거지요. 우리집 애들도 지금 둘 다 대학생인데 요만할 때 마찬가지였어요. 이 두 녀석은 사이가 좋지 않아 싸운 건 아닌 것 같아요. 이 자리에서 바로 화해하도록 하고, 선생님께선 일주일 동안 둘이 함께 화장실 청소하기 벌칙을 내려 주시는 게 어떨까요?”
 
대처는 능숙했고 요청 또한 적당했다. 누구도 반대할 까닭이 없는 깔끔한 판결이었다. 그는 어쩌면 이런 일을 수없이 겪고 처리해 온 어느 학교의 선생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세 어른은 누구도 잘못을 묻지 않았으며, 더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그의 말을 고개 끄덕여 들으면서 나는 아주 중요한 것을 보았다.
 
오늘과 같은 일이 닥치면 사람들은 누구나 당황스럽고 심란해지기 마련이다. 내 아이 걱정도 걱정이거니와 선생님과 상대편에 잘 사과하고 해결책을 구하느라 전전긍긍한다. 그런데 그는 주변에 성심을 다하면서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 발만 동동 구른다고 하여 되돌릴 수도, 더 나아지는 일도 없으니 이럴 땐 차분하고 성실하게 어른의 할 일을 하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식 둘을 키워낸 실전 경험에서 얻고 쌓인 지혜이리라. 길고도 험난한 양육의 터널을 먼저 통과해 저만치 유유히 미끄러져 나가는 앞차 운전자가 부럽고 존경스러웠다.
 
키는 비슷했지만 찬희는 미카엘보다 덩치가 훨씬 컸다. 찬희의 얼굴이며 목에는 반창고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미카엘놈의 눈두덩이에 퍼런 멍이라도 하나 물들어 있었다면 조금 덜 미안했을 것이다. 대수롭지 않은 아이들 싸움이었다곤 해도 상대적으로 좀 더 가해자의 편인 듯싶은 마음에 앉은 자리가 가시방석이었다. 아이들은 언제 싸웠냐는 듯, 책임감이라곤 한 점 찾아볼 수 없는 천진한 얼굴로 각자의 아이스티를 후루룩 빨아들이고 있었다.
 
찬희 큰아빠가 진료비 결제를 우선 한꺼번에 했던 터라 돈을 드리려고 하는데 그마저 괜찮다며 한사코 거절을 한다. 자신은 조카에게 밥 한 번 산 셈 치면 되는 것이니 찬희 부모와 연락해 서로 인사나 챙기고 잘 끝내라는 것이다. 사건의 처음부터 마무리까지, 병원을 나서는 순간까지 처음 만난 그에게 진 빚이 눈덩이처럼 불었다. 같은 보호자로 한 자리에 갔지만 나는 오히려 보살핌을 받은 것 말고는 한 일이 없다. 그에게서 받은 배려와 위안을, 나 역시 언제든 몇 번이든 누군가에게 꼭 돌려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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