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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세이/<아빠의 비밀일기>

03. 순수의 기원

by BOOKCAST 2022.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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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다섯 살, 말 안 들어 먹는 건 국가대표급이고 갈수록 제멋대로이기만 한 사춘기 소녀 로사.
 
그런 로사를 아직도 아빠는 가끔 “아가야!”라 부른다. 언젠가 혹자 하나는 그걸 듣고는 지청구를 놓았다. “아니, 얘가 어떻게 아직도 아가야?”
 
모르는 소리 하고 있다. 경솔하게 입 밖에 내서 좋을 게 없는, 그야말로 모르는 소리다. 딸이 없어 불행한 자가 요량 없이 뇌까린 말에 대꾸는 해서 무엇 하나. 대체 나이가 무슨 소용? 아빠에게 딸내미의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영원한 아가가 있다는 기쁨을 어찌 말로 다 설명할 수가 있을까!
 
가족 내부에서도 민원이 접수된 적이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미카엘 군의 의견이었다.
“로사가 지금 몇 살인데 아직도 아가라고 불러요?”
 
여동생이 여전히 아가인들 오빠로서 별 손해 볼 일은 없다. 처음엔 근거가 부실한 불만으로 간주하여 생각해볼 가치 없이 기각하려 했다. 아빠의 정당한 권한을 침해하는 행위로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몇 마디 더 들어본 뒤 마음을 고쳐먹었다. 열한 살짜리 아이로서는 가질 수 있는 시샘이고 억울할 수 있는 제청이었다.
 
자기도 어린애인데 동생만 늘 ‘아가 대접’을 받고 있으니 마음 상할 만하다. 이것은 맏이들이 겪는 태생적이며 운명적인 설움이기도 하다. 한 번 막내는 언제까지나 막내로 귀여움을 받고(게네도 나름 ‘막내 취급’을 받느라 고충이 많겠지만), 맏이는 두어 살 때부터 맏이다운 의젓함을 주문받는 일이 생긴다. 나 역시 미카엘에게 미안할 때가 종종 있다. 어리고 약한 여동생을 오빠가 보호하고 조금이라도 더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유언 무언의 요구를 강제하고 있는 것 같아 말이다.
 
미카엘의 불만을 가당한 것으로 인정하였다. 아빠는 지체 없이 반성하고 선언했다.
“너의 억울함을 충분히 이해했다. 이제부터는 너도 평등한 아가다. 로사를 아가라고 불러왔으니까 편의상 넌 ‘큰 아가’라고 부르겠다!”
 
옆에 있던 로사는 “진짜요?” 하며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고 미카엘은 썩소를 지었다. 이 장난은 그로부터 며칠 동안 우리 가족의 웃음 버튼이 되었다. 로사는 아빠를 따라 ‘큰 아가야, 아가오빠’ 등 제 편할 대로 막 갖다 붙여 불렀고, 미카엘도 싫지만은 않은 장난으로 받아들이며 그냥저냥 웃어넘겼다.
 
그러다 며칠 후 동네에서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놀고 있는 미카엘을 발견했다. 반가움과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온 동네가 떠나가라 큰 소리로 불렀다.
“어이쿠! 큰 아가야! 어이, 우리 큰 아가!”
 
어리둥절한 친구들, 그리고 곤경에 빠진 복잡한 미카엘의 표정이 정지화면처럼 멈춰져 있었다. 그날 집에 돌아온 미카엘은 이 호칭을 중단해줄 것을 진지하게 요청했다.
 
 
아가 어록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 참 좋겠다 싶었던 꼬물이 녀석들이 커서 고등학교에, 중학교에 다닌다. 미카엘은 어느덧 아빠보다 훨씬 키가 커졌고 로사와의 말싸움에선 이기기를 포기한 지 오래다.
 
아이들은 말을 떼면서부터 자기만의 세계를 거침없이 표현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참으로 해맑고 귀엽고 신기해서, 어른들이 감히 넘겨짚지 못하는 세계다. 이 시절에 듣게 되는 아이의 말들은 부모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된다. 보석처럼 빛나는 아이의 말과 표정, 순간들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어서 그때그때 메모를 해두었다가 이따금 꺼내 본다. 매번 새롭고 즐겁다. 다시 메모를 볼 때 그제야 ‘아 이런 일도 있었던가?’ 하며 잊었던 추억이 재생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럴 때 오는 안도감은 크다. 기록해 둔 나를 칭찬한다. 그 메모를 모아 둔 폴더 이름이 <아가 어록>이고, 여기서 재미있는 에피소드 몇 개는 이 책의 글감으로 쓰고 있다.
 
가족의 이야기는 무엇이든, 어떤 방식으로든 최대한 많이 기록해서 나쁠 것이 없다. 붙잡아 두지 않으면 잃어버리기 쉽고 그러기엔 너무나 소중한 것들이다. 카메라가 다 포착하지 못하는 감성과 숨결을 때로는 텍스트가 담아내기도 한다. 십 년 전의 메모를 보면서 아이들의 목소리와 피부를 느낀다. 어디 그뿐인가. 어느새 젊은 아빠로 돌아가 있는 나를 만날 수 있다.
 
로사(7살) : 아빤 언제가 가장 행복해요? 전 제가 태어났을 때가 가장 행복했어요.
아빠 : 하하하. 그런 말이 어디 있어.

(다음 날)

아빠 : 근데 아가야, 어제 그 말은 왜 물어봤어?
로사 : 아빠도 저랑 같은 생각일 것 같아서요!
아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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