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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세이/<조금 이른 은퇴를 했습니다>11

10. 다시, 제주살이의 시작 (마지막 회) 아침 9시. 제주행 배편이 있는 완도의 하늘은 맑았고, 바람은 잔잔했다. 숙소를 나와 두 달 치의 짐이 가득 실린 차를 몰아 완도항으로 갔다. 평온한 바다 위로 우리가 타고 갈 여객선의 모습이 보였다. 안내자의 수신호에 따라 차량을 선적하는 배 밑 후미로 이동했다. 배 안쪽엔 이미 우리와 함께 제주로 갈 차량이 줄지어 있었다. 이제 채워지고 있는 줄을 따라 뒤쪽에 차를 세웠다. 차량을 통제하던 사람들은 능숙하게 차바퀴에 줄을 묶어 배 바닥에 단단히 고정시켰다. “이제 배 타고 조금만 가면 제주야.” 6년 만의 제주였고, 결혼 이후 처음 가는 제주였다. 집을 나와 첫 독립생활을 하고, 아내를 만나고, 곳곳을 다니며 연애를 하고, 평생 함께할 결심을 했던 곳. 아내와 술이라도 한잔할 때, 어느 정도 취기가 .. 2022. 2. 4.
09. 낯선 동네에서 살아보기 남들보다 조금은 느려도 괜찮다. 우리가 살아갈 앞으로의 날들이 궁금해진다. 은퇴를 몇 달 남긴 작년 봄. 퇴직일을 기다리는 시간은 더뎠다. 은퇴까지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하루하루가 한없이 느리게 흘러갔다. 회사 생활하는 내내 프로젝트의 마감 일정에 쫓겼다. 부족한 시간을 야근으로 채워가며 업무와 씨름하다 마침내 끝날 것 같지 않던 프로젝트를 털어내면, 그새 두어 개의 계절이 훌쩍 지나 있었다. 이런 시간을 20년 가까이 보냈다. 시간이 더디게 흐르는 건, 전엔 미처 겪어보지 못한 경험이었다. 퇴근 시간만을 기다리는 늦은 오후, 다시 한번 달력을 열어 은퇴하기까지의 일수를 셌다. 64일이 남았다. “아. 오전에도 64일 남았었는데. 그대로네.” 그즈음 은퇴 후의 하루하루를 무엇으로 채워나.. 2022. 2. 3.
08. 돈 문제는 명확해야 한다. “이번 달에 얼마나 썼어?” 아내가 가계부를 적는 스프레드시트를 열어 월초부터 사용한 금액을 살핀다. 식사 시간이 다 되어서 공연히 생활비를 물어보는 이유를 아내도 잘 알고 있다. 식사 준비가 귀찮으니 외식을 하면 어떨까 했지만, 이번 달 쓴 비용을 확인한 아내는 단호했다. “벌써 100만 원이 넘었어.” 한여름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면서 부엌에 들어가는 게 내키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밖에서 사 먹자 했다. 전달보다 외식을 많이 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리 비싸지 않은 것들로만 먹었으니 아직은 생활비 여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주말에 마트에서 장 한 번 보면 끝이야. 오늘은 외식 안 돼. 뭐 당신이 사는 거면 나가서 먹어도 되고.” 한 달 용돈으로 10만 원밖에 주지 않으면서 밥을 사라니. 인심은 넉넉.. 2022. 2. 2.
07. 평생 해 줄 수 있는 것만 할래 모두 내가 앞으로도 평생 할 수 있는 것들이다. 관심을 갖는 것, 지켜보는 것, 집중하는 것, 함께하는 것. 아내와 난 결혼기념일을 챙기지 않는다. 그날은 보통의 여느 날과 다르지 않다. 결혼 후 처음 맞았던 결혼기념일 날, 나는 회식이었고 아내는 야근을 했다. 지금까지 5번의 결혼기념일을 보냈는데, 기억으로는 저녁을 딱 한 번 함께했다. 동네 고깃집에서 삼겹살을 먹었고, ‘그래도 기념일이니까’ 하며 소주를 곁들었다. 기념은 하지 않지만, 그 날짜를 그냥 버려두기는 뭐해서 집 현관문의 비번으로 살려두었다. 크리스마스도 큰 의미를 두지 않고 흘려보낸다. 우린 그날을 사람이 너무 많아 거리가 붐비는 날, 밖에 나가면 고생하는 날, 그냥 동네 산책하는 게 나은 날로 여긴다. “이번 크리스마스 때 어떤 이벤트를.. 2022. 1. 28.
06. 이른 은퇴 준비, 부모님이란 큰 산을 넘다. 은퇴 후 살아갈 모습이 구체적으로 그려지면서, 언젠가 술자리의 친구들에게 처음으로 은퇴 계획을 말했다. “은퇴라고?” 2년 가까이 아내와 함께 치열하게 고민하고 준비했던 이슈였다. 가지고 있는 집을 파는 거로 10년을 벌었고, 10년이 지난 후부터는 든든한 연금이 있었다. 은퇴 이후 살아갈 모습은 아내와 이미 그렸다가 지우고, 다시 그리기를 수도 없이 반복했다. 형태가 보이기 시작하는 은퇴 후 모습은 제법 괜찮아 보였다. 쏟아지는 질문을 받을 준비가 됐다. 기자 회견장에서 경쟁하듯 손을 드는 기자들에게 질문의 순서를 정해 주는 주인공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도 요즘 은퇴하고 싶다. 네가 먼저 해 보고 어떤지 알려줘.” 음? 그게 끝이야? 궁금한 건 없어? 질문을 안 하니 덧붙일 게 없었다. 친구들은 내 .. 2022. 1. 27.
05. 돈 못 버는 10년, 집을 팔기로 했다. 앞으로 살아갈 매일매일이 여행 같은 삶이 될 것 같았다. 밥벌이가 될,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건 조급해하지 않기로 했다. 짧은 호흡으로 서둘러 찾으면 지금까지 했던 일과 비슷한 일들만 눈에 보일 것 같았다. 당장 돈이 되는 일이 아니더라도, 이를테면 운동을 한다든가 책을 읽는다든가 여행을 다닌다거나 하는 시간을 충분히 가져보기로 했다. 그렇게 쌓이는 시간은, 하루하루 버텨낸 것만으로 만족하던 때의 시간과는 분명히 다를 거라고 기대했다. 회사에 얽매이지 않아 자유분방한 일상이 5년, 10년 쌓이게 되면, 지금은 잘 알 수 없지만, 그 긴 시간에서 만들어지는 무언가가 분명히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가는 건 모든 게 다 비용이다. 우리가 가진 돈으로 최대 몇년까지 버틸 수 있을지 궁금했다. 2인 가구.. 2022. 1. 26.
04. 결혼 후, 아내가 변했다. 결혼하기 전에, 퇴사는 나를 한참이나 깎아내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저만치 아래로 내려가 버린, 그래서 더 이상 서로의 눈높이를 맞출 수 없는 나는, 더 이상 아내 앞에서 예전처럼 당당히 설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설령 용기를 내어 피하지 않고 고개를 들어 마주 선다고 하더라도, 그 모습이 뻔뻔함으로 보이지는 않을까 두려웠다. 아내는 그런 걱정이 나 혼자 불어 제껴 부풀어버린 풍선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깟 일 때문에 당신이 달라지는 건 없어.” 퇴사 시기를 잡기 전 돌아봐야 할 것이 많았다. 결혼을 하면서 새로운 가족이 늘었고, 가족은 내 선택과 결정을 일일이 설득하지 않아도 되는 친구나 지인들과는 달랐다. “너희 부모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나의 퇴사를 망설임 없이 동의해 주던 아내.. 2022. 1. 25.
03. 내가 먹여 살리면 되잖아! 아내와 나는 스쿠버다이빙 어드밴스 자격증이 있다. 스쿠버다이빙 입문자가 따는 첫 번째 자격증이면서 최대 수심 18m까지 다이빙할 수 있는 오픈 워터 자격증은 2012년 제주도에서 취득했고, 그해 보라카이에서 오픈 워터 자격증보다 한 단계 위인 어드밴스 자격증을 취득했다. 수심 30m까지 다이빙할 수 있는 어드밴스 자격증까지만 있어도 거의 대부분의 세계적으로 유명한 다이빙 포인트 접근이 허용된다. 2012년 이후로 1년에 한 번, 적어도 2년에 한 번 정도는 아내와 함께 스쿠버다이빙 여행을 떠났다. 보라카이, 보홀 발리카삭은 결혼 전에 다녀왔고, 호주의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 태국의 시밀란은 결혼 후에 다녀왔다. 아내는 다음 다이빙 포인트로 몰디브를 가고 싶다고 했는데, 일단 코로나가 진정돼야 한다. 사실.. 2022. 1. 24.
02. 아내와 함께하기 위해서는 아내를 만나기 이전에 했던 연애는 과정도 결과도 그리 좋지 않았다. 난 상대방이 힘들 때 기대어 쉴 수 있는 넓은 어깨를 가져야 했다. 남들은 무심코 지나치는 장점을 볼 수 있는 눈과 무엇이든 공감하면서 들어줄 수 있는 귀, 듣기 좋은 달콤한 말을 해 주는 입을 가져야 했다. 이상적인 연인 사이가 되기 위해서는 내 능력을 뛰어넘는 너무나도 많은 것들을 갖추어야 했다. 상대방이 나에게 그런 능력을 요구한 것도 아닌데, 그냥 스스로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언제나 둘의 관계에서 든든한 울타리이고 싶었다. 이런 생각이 빚어낸 배려심과 이타심이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기엔 내 그릇이 너무 작았다. 대가를 바라는 행동은 채권자의 마음이 되어 언젠가 나에게 갚아.. 2022. 1. 21.
01. 나의 꿈은 가정주부가 되는 거야 이제는 내가 먼저 어차피 잡힐 손을 아내에게 내어준다. 마지막 출근을 했다. 연차가 남아있어서 실제 퇴직일은 아직 며칠이 남았지만 출근은 이걸로 끝이다. 20년 가까이 일을 했고, 그 기간 동안 여러 회사를 옮겨 다니다가 마지막으로 정착한 이 회사에서 12년 넘게 있었다. 퇴사를 처리하는 담당자와 마지막 면담을 했다. 담당자는 별로 궁금할 것도 없는 질문 몇 가지를 했다. 형식적이긴 하지만 회사에 아쉬웠던 점을 말해 달라기에 희망퇴직 제도가 없는 게 가장 아쉬웠다고 얘기했다. 면담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팀별, 파트별, 프로젝트별로 나뉜 단톡방에 마지막 퇴사 인사를 했다. 아쉬워하는 사람들의 인사말을 뒤로하고 단톡방을 나왔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울어 대던 장애 알림톡방도 탈출했다. 쓰던 장비와 사원증을.. 2022. 1. 20.
00. <조금 이른 은퇴를 했습니다> 연재 예고 불확실한 미래와 실패가 두려운 당신께 전하는 공감 에세이 거북이, 고양이, 그리고 아내... 나를 행복하게 하고 끌어당기는 것들의 힘 40대 ‘조금 이른’ 은퇴를 결심하게 된 계기와 과정, 그리고 은퇴 이후의 소박한 일상이 이 책의 중심축이다. 버티는 것만으로도 벅찼던 직장 생활 이야기와 아내와 함께 구상한 은퇴 계획은 누구나 한 번쯤 상상해 봤을 법한 이야기들이다. 은퇴 이후 저자는 가고 싶었던 카페를 간다거나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며 일상을 채워나간다. 그렇게 쌓이는 시간은, 하루하루 버텨낸 것만으로 만족하던 때의 시간과는 분명히 다를 거라고 기대한다. 저자는 회사에 얽매이지 않아 자유분방한 일상이 쌓이게 되면, 그 긴 시간 속에서 만들어지는 무언가가 분명 있을 거라고 믿는다. 저자는 어릴 때부터 .. 2022. 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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