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9시. 제주행 배편이 있는 완도의 하늘은 맑았고, 바람은 잔잔했다. 숙소를 나와 두 달 치의 짐이 가득 실린 차를 몰아 완도항으로 갔다. 평온한 바다 위로 우리가 타고 갈 여객선의 모습이 보였다. 안내자의 수신호에 따라 차량을 선적하는 배 밑 후미로 이동했다. 배 안쪽엔 이미 우리와 함께 제주로 갈 차량이 줄지어 있었다. 이제 채워지고 있는 줄을 따라 뒤쪽에 차를 세웠다. 차량을 통제하던 사람들은 능숙하게 차바퀴에 줄을 묶어 배 바닥에 단단히 고정시켰다.
“이제 배 타고 조금만 가면 제주야.”
6년 만의 제주였고, 결혼 이후 처음 가는 제주였다. 집을 나와 첫 독립생활을 하고, 아내를 만나고, 곳곳을 다니며 연애를 하고, 평생 함께할 결심을 했던 곳. 아내와 술이라도 한잔할 때,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르면 꺼내는 설렜던 연애 때의 이야기. 울고 웃었던 모든 이야기의 배경인 제주에 1시간 20분 후면 도착한다.
6년 전 아내와 결혼을 약속하고, 함께하는 새로운 삶을 위해 4년간 살던 제주를 떠나던 날도 하늘은 맑았고, 바람은 잔잔했다. 배 뒤편에 서서, 완도로 향하는 배의 속도만큼 조금씩 멀어져 가는 한라산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았다. 바다 너머로 ‘언제 또 여길 와 볼 수 있을까’ 되뇄었다. 서울에서 제주까지는 비행기로 한 시간도 채 안 걸리는 거리이고,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다시 찾는 거야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닌데, 이유도 모른 채 그날이 마지막이라도 되는 듯 심란했었다.
제주로 가는 배 안에서 그날의 기억이 났다. 그날 그렇게 심란했던 이유는 짧은 여행을 마치고 떠나는 것과는 다른, 정붙이고 살던 곳을 떠난다는 아쉬움 때문이 아니었을까. 제주를 떠나면서 되뇄던 ‘언제 또 여길 와 볼 수 있을까’의 의미를 지금 와서 다시 되짚어보니 이런 느낌이었다.
‘언제 또 여기서 다시 살아볼 수 있을까.’
다시 찾은 제주는 여전했다. 옥빛 바다에서 일렁이는 파도, 멀리 우뚝 선 한라산을 비껴 불어오는 상쾌한 바람, 그 바람이 급하게 몰고 가는 구름을 풀어놓은 넓은 하늘. 하긴 이런 게 변할 리는 없겠지. 6년 전에는 비어있던 땅에 새로 들어선 건물들이 몇몇 보였지만, 내가 살던 제주 그대로의 모습이다.
“제주 가면 가장 먼저 먹어보고 싶은 건?”
“우리 살던 동네 밀면!”
밀면은 제주에서 처음 경험했었다. 최고의 수육집을 찾아냈다며, 줄 서서 먹는 곳이라며, 지금까지 자기가 먹어 본 것 중 가장 맛있는 수육이라며 호들갑을 떨던 회사 동료의 추천으로 찾아갔던 식당에서, 아내와 난 수육보다 밀면에 반했다. 온 김에 한번 맛이나 보자며 시켰던 밀면은 우리가 수육을 먹으러 이 식당에 왔다는 걸 잊게 했다. 그 맛있다던 수육은 단지 밀면에 딸려 나오는 사이드 메뉴처럼 느껴졌다.
“밀면이라는 게 이렇게 맛있는 거였어?”
밀면이 부산의 음식이라는 걸 알고, 부산 여행 중 몇 군데 찾아가 먹어보긴 했지만 내가 알던 맛이 아니었다. 밀면을 좋아한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내가 좋아했던 건 그 식당의 밀면이었다.
서귀포 쪽의 산방산 근처까지 차로 40분을 달려가야 먹을 수 있었던 그 밀면집이 아내와 내가 살고 있던 동네에 새롭게 분점을 냈다. 걸어갈 수 있는 거리였다. 더 이상 7천 원짜리 밀면을 먹겠다며 한라산 너머의 동네까지 갈 필요가 없었다. 느지막이 잠에서 깬 주말 점심으로도 먹고, 일찍 퇴근한 평일 저녁으로도 먹었다. 질리지 않았다. 그 집의 단골이 됐다. 6년 만에 찾아간 그 집의 밀면은 그때보다 가격이 좀 오르긴 했지만, 기억하고 있는 그 맛이었다.
식당을 나와 아내와 내가 살았던 동네를 걸었다.
“아. 저 카페 아직 있다.”
“여기 흑돼지집 있지 않았나? 없어졌나 봐.”
“저기 나 살던 집 보인다. 너 엄청 드나들었었는데. 거의 너희 집이었지.”
“우리 집 앞 주차장 그대로네. 남편, 기억나나? 당신이 주차장 뷰라고 엄청 무시했잖아.”
제주 어디에나 있는 흔하고 평범한 길, 동네였다. 하지만 아내와 나, 4년의 세월이 얹어진 그 동네는 길 구석구석, 집 하나하나가 특별했다. 이야기는 끊이지 않았다. 보이는 집들, 돌아가는 골목길 모두가 이야깃거리였다.
“이 길, 당신하고 손잡고 걷는 건 처음이다.”
문득 생각이 났는지, 아내가 멈춰 서서 말했다. 같은 동네에 살고, 그렇게나 자주 만나 이 동네를 걸었지만, 한 번도 손을 맞잡고 걷지 못했다. 사내 연애였고, 연애는 비밀이었다. 이 동네에는 회사 사람들도 많이 살았다. 모퉁이 2층 빌라의 창문에서, 길 건너 낮은 담 너머 집의 창문에서 회사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둘 다 겁이 많았다. 가로등 불빛만 있는 어두운 밤에도 아내와 난 한 번도 손을 잡아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제주에서의 연애는 그랬다.
“그러네. 이 길, 처음 손잡고 걸어보네.”
제주에서의 첫날, 값비싼 갈치구이나 흑돼지가 아닌 몇천 원밖에 하지 않는 밀면을 먼저 찾고, 사람들로 북적대는 성산 일출봉이나 협재 바닷가가 아닌 둘의 기억이 쌓여 있는 흔하고 평범한 동네 길을 먼저 걸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우리에게 제주는 유명한 관광지이기 전에 4년 동안의 이야깃거리가 곳곳에 넘쳐나는, 우리가 살던 곳이기 때문이다. ‘언제 다시 살아 볼 수 있을까’라는 기약 없던 바람은 떠난 지 6년이 지나고 이루어졌다.
다시, 제주살이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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