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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세이/<조금 이른 은퇴를 했습니다>

08. 돈 문제는 명확해야 한다.

by BOOKCAST 2022. 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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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달에 얼마나 썼어?”

아내가 가계부를 적는 스프레드시트를 열어 월초부터 사용한 금액을 살핀다. 식사 시간이 다 되어서 공연히 생활비를 물어보는 이유를 아내도 잘 알고 있다. 식사 준비가 귀찮으니 외식을 하면 어떨까 했지만, 이번 달 쓴 비용을 확인한 아내는 단호했다.

“벌써 100만 원이 넘었어.”

한여름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면서 부엌에 들어가는 게 내키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밖에서 사 먹자 했다. 전달보다 외식을 많이 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리 비싸지 않은 것들로만 먹었으니 아직은 생활비 여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주말에 마트에서 장 한 번 보면 끝이야. 오늘은 외식 안 돼. 뭐 당신이 사는 거면 나가서 먹어도 되고.”

한 달 용돈으로 10만 원밖에 주지 않으면서 밥을 사라니. 인심은 넉넉한 곳간에서나 나는 법이다. 내심 기대하는 아내의 눈빛을 외면하며 음식 재료를 보관하는 선반을 열었다. 손이 많이 가지 않으면서 맛있게 먹을 저녁거리가 뭐가 있을까. 쌓아 올린 즉석밥 옆으로 소면이 보였다. 며칠 전 장모님이 주셨던 열무김치가 떠올랐다.

“열무국수 어때?”

한 달을 250만 원으로 살자 했다. 그중 50만 원은 양가 부모님에게 드리는 용돈이니 우리가 한 달에 쓸 수 있는 금액은 200만 원이다. 아파트 관리비나 통신비, 보험료 등 매달 고정으로 들어가는 돈이 70만 원이다. 그걸 제하고 남는 130만 원으로 한 달을 꾸린다. 130만 원의 소비 기준은 나름 명확하다. 둘이 함께 쓰는 것들이거나 생활에 꼭 필요한 것들, 이를테면 장 보는 데 드는 비용이나 외식비 등이 130만 원에 포함된다. 어쩌다 한 번씩 사는 계절옷이나 미용실, 화장품 비용도 생활비에서 쓸 수 있다. 혼자를 위한 것에 생활비를 건드리면 안 된다. 누군가 약속이 있어 홀로 밥을 먹어야 할 때, 집에 있는 재료들을 마음껏 써서 차려 먹는 건 뭐라 하지 않지만, 밖에서 나가 사 먹는다면 각자의 용돈을 써야 한다. 주유비나 톨게이트비는 생활비가 맞지만, 혼자 다녀오는 여행에서의 주유비와 톨게이트비는 생활비로 쳐 주지 않는다.

“우유랑 식빵 없길래 내가 사놨어. 이체해 줘.”

얼마 되지 않는다고 무시할 수가 없다. 10만 원의 용돈으로 감당하기엔 꽤나 큰 금액이다. 받을 건 받아야 한다. 돈 문제만큼은 명확해야 한다.

내가 은퇴하면서 바로 한 달 생활비를 조정했으니, 예정했던 250만 원으로 한 달을 산지 이제 반년이 지났다. 남기지도 않았지만, 한도를 초과하지도 않았다. 맞벌이를 할 때도 250만 원을 넘기지 않았던 적이 꽤 있었다. 둘 다 갖고 싶은 것이 별로 없었고, 필요한 걸 사더라도 그리 비싸지 않은 걸 골랐다. 회사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값비싼 숙성한우로 달래려 하는 아내가 그나마 250만 원의 생활비를 위협하는 한 가지 변수였는데, 은퇴를 하고 회사 일을 하지 않으면서 아내는 더 이상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다. 어쩌다 스트레스 해소용이 아닌, 순수한 마음으로 소고기가 먹고 싶을 때면 마트에서 사다가 불판에 직접 굽는다.

“우리 가스버너 쓴 지 한 10년 됐나?”

익고 있는 고기에 정신을 빼앗기던 평상시와는 달리 아내의 시선이 오래된 가스버너에 고정되었다. 얼마 전 가스 불의 세기를 조절하는 손잡이가 부러졌는데, 이음새를 잘 맞추기만 하면 가스 불을 켜고 끄는 데는 문제가 없어서 아쉬운 대로 버리지 않고 그냥 쓰고 있던 가스버너였다.
“이제 집에서 자주 고기 구울 거잖아. 내가 예쁜 거 봐 놓은 게 있는데.”
“너 용돈으로 산다면야 굳이 말리지는 않을게.”

둘이 함께 쓸 물건이니 생활비로 사기야 하겠지만, 혹시나 하며 괜히 슬쩍 던져본다.

“별로 안 비싸. 다음 달 외식 한 번만 줄이면 돼.”

역시나 아내도 돈 문제에 있어서는 나만큼이나 명확하다.

명확한 기준을 세워놓은 생활비처럼, 앞으로 생길지 모르는 각자의 소득에 대해서도 미리 손을 봤다.

“혹시라도 나중에 누군가 돈을 벌면 그건 다 생활비인가?”

둘 다 다시 회사에 다닐 일은 없을 거고, 회사 말고는 돈을 벌 다른 방법을 알지도 못하면서 논쟁이 시작됐다.

“생활비로 다 내놓는 건 너무하잖아. 그럼 나 앞으로 돈 안 벌래.”

돈을 벌지 않겠다는 선전 포고에 아내가 흠칫했다. 은퇴를 했으니 돈을 벌지 않겠다는 게 딱히 이상할 것도 없는데 한참을 고민하던 아내가 당근을 제시했다.

“그럼 250만 원까지만 생활비로 내고 나머지는 갖는 거로.”

1,000만 원을 벌면 생활비를 제외한 내 돈이 750만 원이나 생긴다. 나쁘지 않았다. 아내가 내민 당근을 덥석 잡았다.

시간이 지나 다시 생각할수록 아내가 내밀었던 당근이 시들해 보였다. 은퇴한 내가 무슨 재주로 1,000만 원을 번단 말인가. 회사를 다닐 때도 내 월급은 1,000만 원 근처에도 가지 못했었다. 아내를 다시 협상 테이블에 앉혔다.

“나 그냥 돈 안 벌래.”

한 번 써먹은 공격이어서인지 아내의 표정이 이전과 다르게 시큰둥하다. 급히 다음 말을 이었다.

“글찮아. 생각해 봐. 내가 무슨 수로 250만 원 이상을 벌어서 내 몫을 남기겠어.”

말을 들은 아내는 다행히 무리한 문제 제기가 아니라는 눈치다.
아내가 내놓을 두 번째 당근을 기다렸다.

“좋아. 그럼 절반은 생활비, 절반은 용돈. 더 이상은 안 돼.”


벌게 될 돈의 절반은 내 몫이라 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여 1,000만 원을 벌더라도 생활비로 내놓아야 하는 한도도 250만 원까지라 했다. 만족스러운 제안이었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마지못한 척 아내의 두 번째 당근을 잡으며 괜히 한마디를 보탰다.

“소득세가 절반이라니. 너 완전 북유럽 스타일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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