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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혼자서 종이우산을 쓰고 가다>11

10. 자신만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떠나 버린 아버지에게 등을 보이는 것..(마지막 회) 남편이 운전하는 차 안에서 다케이 미도리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입을 여는 순간 통곡이 터져 나올 게 뻔했고 그 이전에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유일하게 떠오르는 건 사과의 말이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일으킨 일 때문에 남편에게까지 이런 고통과 불명예를 맛보게 해서 미안하다는 마음이 뜨겁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사과해 버리면 아버지가 너무 가여운 듯한 기분이 들었다. 왜냐면─. 다시 눈에 눈물을 글썽이면서 쉰두 살 나이인 지금까지도 부모님을 늘 아빠 엄마라고 부르는 미도리는 생각한다. 왜냐면, 그래서는 마치 아빠가 나쁜 짓을 저지른 것 같잖아─. 아니면 나쁜 짓을 저지른 게 맞는 걸까? 마음이 너무 혼란스러워서 그 판단도 서지 않는다. 줄곧 입을 막고 있던 손수건을 한순간이라도 입에.. 2022. 10. 1.
09. 이미 충분히 살았습니다. 이미 충분히 살았습니다. 유서 속의 그 한 문장이 도우코의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게다가 그 글씨─. 유서는 블루블랙 만년필로 쓰여 있었다. 도우코가 어릴 적부터 받아 온 많은 편지도 그러했다. 굵직굵직하면서도 특유의 둥그스름한 느낌이 나는 부드러운 그 글씨. 두 번 확인할 것도 없이 도우코가 아는 치사코 씨 그 자체여서 치사코의 인품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데다 거의 체온과 육성까지 동반하여 도우코를 동요하게 만들었다. 고인과 마지막으로 만난 때가 언제이며 전화 통화 외에 마지막으로 이야기 나눈 게 언제인지, 어떤 내용의 이야기였는지, 최근 들어 달라진 점은 없었는지, 고인과는 친했는지, 다른 두 사람에 대해 뭔가 들은 이야기가 있는지─. 이런 경우, 경찰에는 질문의 수순이란 것이 있을 테니 어쩔 수 없.. 2022. 9. 30.
08. 이런 사건을 일으키지 않더라도 남은 생이 그리 길지는 않았을 터이다. 시노다 도요로서는 믿기 어렵게도 아버지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아키타 집은 팔아 버리고, 장서는 대부분 도서관에 기증하고(나머지는 유학 중인 손녀에게 물려준다고 유서에 쓰여 있고, 그 책들은 배편으로 이미 발송을 마쳤다), 가재도구 외 개인 물품도 전부 처분되고(평소 그릇에 꽂혀 있었고, 구식 카메라를 즐겨 수집하기도 하고 상당수의 음반도 갖고 있었을 터인데 그것들을 아버지가 어디서 어떻게 처분했는지 도요로서는 짐작도 가지 않는다), 통장이며 보험 증서, 연금 수첩, 집 매매 계약서와 같은 중요 서류는 물론이고 배편으로 손녀에게 보낸 짐의 부본에 이르기까지 꼼꼼하게 정리해 가방에 넣어 두었다. 확실히 충동적인 자살은 아니고, 그만한 준비를 가족에게 일절 알리지 않고 전부 혼자서 진행해 왔다는 사.. 2022. 9. 29.
07. 대체 왜, 엄마의 엄마라는 사람은 하필이면 섣달 그믐날 자살 따위를 했을까. 100엔 숍에서 산 보풀 제거기는 성능이 꽤 우수해서 본체가 작은 것을 감안하면 의외일 만큼 큰 모터 소리와 함께 적확하게 보풀을 빨아들인다. 스웨터 두 장과 코트 한 벌의 보풀을 제거한 후, 나는 아내에게 보풀이 생긴 옷가지가 없냐고 물었다. 가능하면 코트처럼 큰 게 좋겠다고 덧붙인 까닭은 단순 작업에 몰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설명서에 따르면 털이 짧은 카펫의 보풀도 제거할 수 있는 모양인데 우리 집에 카펫 같은 건(털이 길든 짧든) 한 장도 깔려 있지 않다. “갔으면 좋았을걸.” 내 질문을 무시하고 아내는 말했다. “가지 않고서 심란하고, 그래서 보풀 따위 제거하고 있을 바엔 차라리 갔으면 좋았을걸.” 라고. 이번엔 내가 그 말을 무시한다. 남향의 거실은 밝은 데다 기름 난로 덕에 따뜻하다. 어젯밤.. 2022. 9. 28.
06. 그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뼛속 깊이 스며드는 맛과 차가움. 낮에 경찰서에는 쥰이치 외에 시노다 간지의 유족과 미야시타 치사코의 유족이 와 있었다(사정 정취는 따로따로 받았지만, 첫 설명은 한방에 모여 다 같이 들었다). 유족도 아닌 쥰이치가 불려 간 까닭은 그렇게 하도록 유서와 함께 쥰이치의 연락처가 남겨져 있었기 때문이며 경찰의 설명에 따르면 츠토무에게는 일가친척이 없는 듯하다. 확실히 줄곧 독신을 유지해 왔고 외동이라서 형제자매도 없고 양친은 이미 타계했다. 하지만 단 한 명의 친척도 없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인지 쥰이치는 알 수 없었다. 사촌이든 육촌이든, 그 자녀든 손주든 누군가는 있지 않을까. 아니면 츠토무 자신의 숨겨 둔 자식이라든지? 쥰이치가 아는 것만 해도 츠토무에게는 여자가 몇 명인가 있었다. 여자뿐만이 아니다. 츠토무에게는 친구도 아주 많았.. 2022. 9. 27.
05. 이곳에는 일상이 있고 세상은 여느 때처럼 움직이고. 새해 첫날 밤부터 문을 여는 바(Bar)를 가와이 쥰이치는 한 곳밖에 알지 못한다. 도저히 바로 집에 들어갈 기분이 아니어서 집에선 더 멀어지지만 전철을 타고서 강변에 오도카니 자리한 그 가게의 문을 밀고 들어갔다. 카운터석에 앉아 위스키를 주문한다. 정월 초하룻날부터 밖에서 술을 마시는 인간이 그리 흔할까 싶었는데 예상은 빗나가고 좁은 가게 안은 손님들로 복작였다. 하지만 쥰이치에게는 오히려 감사한 일이었다. 적어도 이곳에는 일상이 있고 세상은 여느 때처럼 움직이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어쩐 일로 혼자시네요.” 젊은 바텐더의 그 말에, “응. 뭐.” 라고 대답은 했지만 실은 혼자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혼자로 보이겠지만 츠토무라는 남자와 함께라고. 술잔을 아주 살짝 들어 올렸다. 헌배가 아니라 건.. 2022. 9. 26.
04. 치사코 씨가 떠나 버렸다. 도우코가 알게 된 것은 그게 다였다. 점심상은 호화로웠다. 떡국과 설음식 외에 고기 요리 두 종류와 샐러드 두 종류가 올라오고, 동글동글한 방울 초밥까지 나왔다(“많이 만들어 놨으니까 괜찮으면 나중에 싸 갖고 가게나.”). 별로 잘하지 못하는 술을 마시면서 나는 묵묵히 음식을 먹었다. “그러고 보니, 누님 또 책 나왔던데.” 장모가 불쑥 말했다. “그렇습니까?” 누나하곤 십 년 넘게 얼굴을 못 봤고 그럭저럭 이름이 알려진 작가인 듯한 누나의 저서도 나는 읽어 본 적이 없다. “신문에 광고가 났더라고. 얼굴 사진까지 넣어서.” “네에.” 나는 짧게 대답했다. 식사를 마치고 장인이 TV를 켜자 갑자기 끔찍한 뉴스 속보가 자막으로 흘러나왔다. 도내 호텔에서 노인 셋이 엽총으로 자살했다는 내용이었다. “뭐야. 무서워.” 리호가 말했다. 자막은 짧고.. 2022. 9. 25.
03. 이미 우리 가족은 와해되고 말았다. 아내가 검정 레이스 속옷(이란 요컨대 브래지어와 쇼츠)만 걸친 모습으로 커다란 코끼리를 타고 앉아 뒤에 많은 늑대를 거느린 채 거리를 행진하면서 길가의 나를 내려다보며 우아하게 미소 짓는다. 그와 같은 기묘한 꿈을 꾸고 눈을 뜨자 곁에 아내의 모습은 없고 시트와 베개만 놓여 있었다. 창밖은 이미 해가 떠올라 밝다. 아내는 거실에 있었다. 제대로 옷을 갈아입고서(나로 말할 것 같으면 파자마에 플리스를 걸쳤을 뿐이다)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다. “잘 잤어? 새해 복 많이 받아.” 지난밤, 날짜가 바뀐 순간에 TV(새해맞이 카운트다운은 TV도쿄를 보며 맞이하는 것으로 정해 놓았다. 화려한 악기 소리가 좋다)를 보면서 건배하고 새해 인사도 입에 올렸지만 더욱 확실히 다지기 위해 다시 한번 말했다. “맥주.. 2022. 9. 23.
02. 가 본 적이 없으니, 그리워한다는 게 이상하지만. 세 사람은 1950년대 말에 처음 만났다. 미술 관련 서적을 다루는 작은 출판사에 먼저 간지가, 몇 년 늦게 치사코와 츠토무가 입사했던 것. 출판업계 전체가 잘나가던 시절이어서 날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즐겁기도 했다. 세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동료도 있었지만 여러 해가 지나는 동안 한 사람씩 빠져나갔다)은 죽이 잘 맞아서 공부 모임이라 칭하며 연극이니 영화니 콘서트를 보러 다니기도 하고, 술잔을 기울이며 뜨겁게 예술론을 벌이기도 했다. 세 사람 사이는 츠토무가 이직해도 간지가 이직해도 변함이 없었다. 마침내 회사가 망한 후에도 공부 모임(이라는 이름의 모임)은 남았다. 각자의 인생이 있다 보니 만나는 빈도가 떨어지는 시기도 있었지만 끊긴 적은 없고, 10년 전에 느닷없이 간지가 아키타현으로 이.. 2022. 9. 22.
01. 아무도 어디로도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바 라운지에는 피아노가 있고 촉촉한 곡이 연주되고 있다. 부스석에 자리를 잡고 앉은 세 사람은 각자 마실 거리를 주문했다. 여위고 키가 크고 피부가 가무잡잡한 시노다 간지는 여든여섯 살, 대머리에 몸집이 작은 시게모리 츠토무가 여든 살이고, 축 늘어진 뺨이 불도그를 연상시키는 데다 숏 보브 스타일의 백발이 남의 이목을 끄는 미야시타 치사코는 여든두 살이었다. 세 사람이 한자리에 모이는 건 두 달 만으로, 그전에도 그다지 띄엄띄엄 만나지는 않았기에 예전과 같다고 세 사람 다 느끼고 있었다. 어쩐지 간단히 옛날로 돌아와 버린 것 같다고. 실제로는 아무도 어디로도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시절엔 이런 날이 오리라곤 생각 못했는데.” 치사코가 그렇게 말하고 건배하듯 맥주잔을 살짝 들어 보인다.. 2022. 9. 21.
00. <혼자서 종이우산을 쓰고 가다> 연재 예고 갖고 싶은 것도, 가고 싶은 곳도, 보고 싶은 사람도, 이곳엔 이제 하나도 없어… 수많은 작품으로 국내 480만 독자에게 사랑받은 에쿠니 가오리의 신간 장편 소설 『냉정과 열정 사이』, 『도쿄 타워』 등 수많은 작품으로 국내 480만 독자들에게 사랑받은 저자 에쿠니 가오리가 신간 장편 소설로 찾아왔다. 전작들과는 사뭇 다른 새로운 분위기의 신간으로 돌아온 에쿠니 가오리는, 유려한 문장으로 독자들에게 잔잔한 매력을 선사한다. 『혼자서 종이우산을 쓰고 가다』에서는 하나의 사건을 계기로 발생하는 등장인물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치밀하게 엮어 전개한다. 에쿠니 가오리 특유의 담담하고 섬세한 문체를 통해 여러 인물들의 삶이 생동감 있게 펼쳐진다. 특히 이번 신간은 팬데믹 시대를 반영함으로써 현재를 살아가는 인물들의 .. 2022.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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