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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혼자서 종이우산을 쓰고 가다>

02. 가 본 적이 없으니, 그리워한다는 게 이상하지만.

by BOOKCAST 2022. 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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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람은 1950년대 말에 처음 만났다. 미술 관련 서적을 다루는 작은 출판사에 먼저 간지가, 몇 년 늦게 치사코와 츠토무가 입사했던 것. 출판업계 전체가 잘나가던 시절이어서 날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즐겁기도 했다. 세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동료도 있었지만 여러 해가 지나는 동안 한 사람씩 빠져나갔다)은 죽이 잘 맞아서 공부 모임이라 칭하며 연극이니 영화니 콘서트를 보러 다니기도 하고, 술잔을 기울이며 뜨겁게 예술론을 벌이기도 했다. 세 사람 사이는 츠토무가 이직해도 간지가 이직해도 변함이 없었다. 마침내 회사가 망한 후에도 공부 모임(이라는 이름의 모임)은 남았다. 각자의 인생이 있다 보니 만나는 빈도가 떨어지는 시기도 있었지만 끊긴 적은 없고, 10년 전에 느닷없이 간지가 아키타현으로 이주한 후에도 이제는 공부 모임이 아니라 생존 확인 모임이라고 일컬으며 연락을 이어 왔다.
간접 조명뿐인 바 라운지는 무척 어두워서 가뜩이나 시력이 쇠약해진 간지는 메뉴판 글씨도 읽을 수 없었다.
“창밖은 밤인데 가게 안이 바깥보다 어두운 건 뭔 조화지?”
중얼거리자,

“바(Bar)니까.”
하고 치사코가 바로 답했다.

“어두운 게 로맨틱하잖아.”
라고. 간지는 푸드 메뉴를 덮는다. 어차피 배는 고프지 않았다.

“바깥 조명이 너무 밝나?”
스스로 묻고 대답하는 모양새로 다시 중얼거리자,

“예쁘잖아, 반짝반짝하는 게.”
하면서 치사코가 싱긋 미소 짓는다. 조명에도 실내의 어둠에도 관심이 없는 츠토무는 ‘이런 곳에 예전엔 자주 왔었지.’ 하고 개인적인 기억을 더듬었다.

“나, 이 곡 되게 좋아하는데.”
치사코가 말하고, 피아니스트가 연주하는 Night And Day에 맞춰 조그맣게 가사를 흥얼거린다.

“치사코, 목소리는 변함없네, 옛날부터.”
간지가 말했다.

나이 들면서 외모가 변해도 목소리가 변하지 않는 건 재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치사코는 거기에는 답하지 않고,
“신기하지 뭐야, 미국 같은 데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데 이런 곡을 들으면 옛날의 미국이 그리워져.”
하고 거의 황홀한 표정으로 말한다.
“가 본 적이 없으니, 그리워한다는 게 이상하지만.”
하고 어쩐지 부끄러운 듯이.


간지도 츠토무도 그건 딱히 이상하진 않다고 인정했다. 두 사람 다 치사코가 뭘 말하려는 건지 잘 알았다.

“이 곡, 옛날에 영화 속에서 프레드 아스테어가 노래했는데.”
츠토무 말에 치사코도 간지도 동의했지만 무슨 영화였는지는 아무도 기억해 내지 못했다.

“아, 이것도 좋아.”
Every Time We Say Goodbye였다. 세 사람 다 특별히 재즈에 밝은 건 아니었지만 스탠더드 곡이라면 대충 알고 있었고 좋아하기도 했다. 그래서 흥얼거린다든지 리듬에 맞춰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면서 콜 버터와 카운트 베이시, 시나트라, 빌 에반스, 토미 플라나건의 음악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건 좋다느니 좋지 않다느니, 누구누구 버전이 낫다느니, 옛날에 어디서 들었다느니. 그 무렵이 어떻고, 그러고 보니 어떻고 하면서 이야기가 종종 삼천포로 빠지기도 하고, 서로가 예전에 했던 말이며 일(“그건 나 아니야.”, “아냐, 간지 씨 맞아.”), 세상을 떠난 친구들의 ─ 그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상상도 가지 않을 ─ 음울한 매력(“그런 녀석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을 거야.”, “아직 육십 대였지? 빨랐네. 너무 빨랐어.”)도 화제에 오르면서 웃기도 하고 숙연해지기도 했다.

세 사람 모두 추억담이라면 얼마든지 풀어낼 수 있었다. 같은 시대를 살아온 것이다. 어느새 가족보다도 오랜 시간을 함께하고 있었다. 가족만큼 친밀한 관계였던 것은 아니라 해도 아주 오래전에는 반했느니 어쨌느니 콩깍지가 씌었던 적이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실제로 간지는 치사코가 자신에게 마음을 두었던 무렵의 일을 기억하고 있으며, 츠토무는 치사코와 잠자리를 같이했던 것을 기억한다. 물론 치사코는 그 전부를 기억했다.

“자, 뭐 좀 먹읍시다.”
츠토무가 말하고, 한 손을 들어 웨이터를 불렀다.

“아, 싫다. 진짜 하나도 안 뵈네.”
메뉴판을 펼친 치사코가 말한다.

“그렇지?”
간지가 웃으며 치사코의 무릎을 툭 쳤다. 밤은 아직 길고 집으로 돌아갈 필요도 없다. 방은 하나밖에 잡지 않았지만 오늘 밤 세 사람에게는 그걸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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