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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인간 실격>6

05. “이거 괴물 그림이야.” (마지막 회) 제가 귀의 고름을 닦아주고 다케이치가 저에게 여자들이 반할 거라는 바보 같은 아부를 했을 때, 저는 그저 얼굴을 붉히며 웃었을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실은 어렴풋이 짚이는 것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자들이 너한테 반하겠어’라는 속된 말을 듣고 거기에 대고 우쭐대는 느낌으로 ‘듣고 보니 짚이는 게 있어’라고 말하는 건, 만담에 나오는 부잣집 도련님의 대사로도 못 써먹을 만큼 오글거리는 감회를 드러내는 일이기에, 절대로 저는 그런 우쭐대는 마음으로 ‘짚이는 것이 있었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저는 남자보다도 여자가 훨씬 더 난해했습니다. 저희 가족은 남자보다 여자가 더 많았고 친척 중에도 여자가 많았습니다. 또 앞에 말한 ‘범죄’를 저지른 하녀도 있군요. 저는 어릴 때부터 여자들하고만 놀며 자랐다.. 2022. 6. 28.
04. 이제는 내 정체를 완벽히 은폐할 수 있겠구나 두 번째 수기 바닷가. 파도가 들이친다고 해도 될 정도로 바다와 가까운 물가에, 새카만 나무껍질의 커다란 산벚나무가 스무 그루 넘게 쭉 서 있습니다. 새 학년이 시작되면 산벚나무는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끈끈한 갈색 어린잎과 함께 그 화려한 꽃을 피우고, 얼마 후에 꽃잎이 눈처럼 날릴 때에는 수많은 꽃잎이 바다에 흩뿌려져서 수면을 아로새기며 떠돌다가, 파도에 실려 다시 바닷가로 밀려오지요. 그 벚꽃으로 뒤덮인 모래밭을 그대로 교정으로 사용하는 도호쿠의 어느 중학교에 저는 입시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았는데, 그럭저럭 별일 없이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 중학교의 교복 모자 배지에도, 교복 단추에도 벚꽃 그림이 피어 있었습니다. 그 학교 바로 근처에 저희 먼 친척분이 살고 계셔서, 아버지가 제게 그 바다와 벚.. 2022. 6. 27.
03. 저에게는 둘 중의 하나를 고르는 능력조차없던 것입니다. 첫 번째 수기 저희 아버지는 도쿄에 업무가 많은 분이어서 우에노의 사쿠라기초에 별장을 갖고 계셨습니다. 한 달에 반 정도는 도쿄의 그 별장에서 지내셨지요. 그리고 돌아올 때는 가족과 친척에게까지 그야말로 엄청나게 많은 선물을 사다 주시는 것이 뭐랄까, 아버지의 취미 같은 것이었습니다. 언젠가 도쿄에 가시기 전날 밤, 아버지는 아이들을 응접실에 모아두고 이번에 돌아올 때는 어떤 선물을 갖고 싶은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웃으며 물으시고는 그에 대한 아이들의 대답을 하나하나 수첩에 적으셨습니다. 아버지가 이렇게 아이들을 다정하게 대하는 건 드문 일이었습니다. “요조는 뭘 갖고 싶니?” 아버지가 이렇게 물으시자 저는 말문이 막혀서 우물거리고 말았습니다. 뭐가 갖고 싶냐는 질문을 들으면 저는 아무것도 갖고 싶어지.. 2022. 6. 26.
02. 저는 인간의 삶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첫 번째 수기 부끄러움이 많은 생애를 보내왔습니다. 저는 인간의 삶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도호쿠 지방의 시골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꽤 자란 다음에야 기차를 처음 보았습니다. 정거장에 있는 육교를 오르내리면서도 그것이 선로를 건너가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은 전혀 몰랐지요. 선로는 그저 정거장의 구내를 외국의 놀이시설처럼 복잡하고 즐겁게, 유행에 맞게 만들기 위해 설치된 것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것도 꽤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저는 육교를 오르내리는 행동을 상당히 세련된 놀이이자 철도 서비스 중에서도 가장 멋진 서비스 중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그것이 단순히 여행객들이 선로를 건너가게 만들어 놓은 굉장히 실용적인 계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는 흥이 깨졌습니다. 또, 어릴 .. 2022. 6. 24.
01. 서문 나는 그 남자의 사진 석 장을 본 적이 있다. 한 장은 그 남자의 유년 시절이라고 해야 하나? 열 살 전후로 추정되는 사진인데, 그 아이가 많은 여자에게 둘러싸여(아마 그 아이의 누나들, 여동생들, 그리고 사촌들인 것 같다) 정원의 연못 근처에서, 굵은 줄무늬 하카마를 입고 고개를 30도 정도 왼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이고 서서 흉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다. 흉하게? 하지만 무딘(말하자면 아름다움과 추함 따위에 관심 없는)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귀여운 꼬마네요.’ 라고 적당히 입에 발린 말을 해도 아주 빈말로는 들리지 않을 정도의, 소위 말하는 세속적인 ‘귀여움’이 그 아이의 얼굴에 있기는 하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아름다움과 추함에 대한 내공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얼굴을 한 번 보고 바로, ‘뭐.. 2022. 6. 23.
00. <인간 실격> 연재 예고 『인간 실격』, 행복마저도 두려워했던 한 사람의 고백 역자 후기 일본의 소설가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1909~1948)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이 작품은 그가 죽기 직전에 쓰였다. 다소 강렬하고 자극적인 제목의 이 소설은 일본은 물론이고 한국에서도 이미 꽤 유명하다. 긴 시간 동안 다양한 번역서가 나왔고 아직도 많은 이들이 꾸준히 읽고 있다. 여러 차례 영화화도 됐으며, 몇 년 전에는 일본의 유명한 만화가가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만화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인간실격』이 누적 판매 부수 천만 부 이상을 기록하면서 다자이 오사무는 일본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아마 십여 년 전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는 그저 우울한 기질을 지닌 사람의 극단적인 이야기라고만.. 2022.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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