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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세이205

09. 라뽀를 통한 노후 예습 (마지막 회) 라뽀(Rapport)는 ‘관계’라는 뜻의 프랑스어로, 의료인과 환자 사이의 관계와 신뢰 정도를 일컫습니다. 의료에 있어서 라뽀가 필수적인 이유는 의료진과 환자 간에 신뢰와 의사소통이 없다면 치료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라뽀를 형성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며, 요양병원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요양병원의 특성상 환자 대부분은 삶의 마지막 순간인 임종까지 의료진과 마주하게 됩니다. 외부의 병의원이라면 A 병원의 진료가 마음에 안 들 경우 B 병원으로 옮기면 그뿐이지만, 요양병원에서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저 역시 요양병원에서 처음 환자를 대할 때,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의 라뽀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열 번의 춘하추동을 동고동락하다 보니 노인 환자들의 삶을 통해 제 인생과 노후에.. 2022. 11. 19.
08. 한의사로서의 삶, 간병인으로서의 삶 주말에 아버님의 생신이었다. 평소 좋아하시는 초밥과 잡채, 미역국, 새우구이를 준비했다. 생일 케이크에 촛불을 켜고 아이와 함께 생신 축하 노래도 불렀다. 명절이나 생신 때마다 외동아들과 며느리만 축하하던 과거에는 잔칫상이 썰렁했는데 아기가 채워준 우리 집 공간은 참 크고 따뜻했다. 아버님은 센터에서 돌아오시면 저녁 시간 거실에서 아이와 놀이를 하신다. 아기가 갓난쟁이 때는 아버님이 주로 실내용 유모차를 밀어 주셨지만, 지금은 상호 작용이 가능할 만큼 자랐다. 아기는 할아버지가 방에서 나오시면 반가워서 “카! 카!”라고 외친다. 카드놀이를 하려는 것이다. 한 통에 50장의 카드가 들어있는데 한자리에 앉아 다 공부할 만큼 아이의 인내심이 늘었다. 아이는 할아버지와 카드놀이를 하면서 자신의 지식을 알려주는 .. 2022. 11. 18.
07. 이제는 만날 수 없는 할매에게 할매는 굳센 바위 같은 사람이었다. 모진 세월의 비바람을 맞고도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제자리에 서 있는 바위. 열아홉 살 전쟁미망인은 자신 앞에 놓인 운명을 받아들이고 어린 아들과 살아남기 위해 가장 단단한 바위가 되었다. 세상사 웬만한 일에 눈도 깜짝 안 하셨고 싸늘한 눈가에는 눈물이 말라 흐르지 않았다. 어느 날 그 바위틈에서 여린 풀이 자라났다. 차갑게 메말랐던 바위는 그 풀잎을 금지옥엽처럼 여기고 사랑했다. 나는 할매의 첫 손녀였고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성장했다. 우리는 25년을 한집에서 살았다. 25년째 되던 해 어느 여름날이었다. 영맘 할매! 할매! 엄마, 할매는? 엄마 할매 2층에 계신다. 요즘 자꾸 2층 소파에 누워만 계시네. 할매가 어느 날부터 2층 소파에 누워만 계셨다. 아픈 데는 없는데.. 2022. 11. 17.
06. 생로병사의 선생님께 배우는 삶과 죽음 영맘 어르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할머니 선생님도 새해 복 많이 받아요. 영맘 감사합니다. 할머니 나는 이제 받을 복은 죽을 복밖에 없소. 자식 고생 그만 시키고 내일이라도 자던 잠에 죽는 것이 소원이에요. 나의 의례적인 새해 인사에 할머니는 비장함을 가득 담아 답인사하신다. 생의 마지막 경계에 가까이 서있는 요양병원에서 ‘죽음’이라는 화두는 젊은 한의사에게 언제나 조심스럽다. 사람은 모두 언젠가 죽는다. 그러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사는 이는 드물다. 잠자리에 누워 내일이 오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잠드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나 역시 요양병원이라는 직장에 다니지 않았다면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타인의 늙음, 병듦, 죽음을 지켜보면서야 ‘나의 죽음, 그 순간은 어떨까.. 2022. 11. 16.
10. 시즌3_엄마의 꽃밭, VR 버츄얼 휴먼에 이어서 이제는 풍경이다! (마지막 회) 2021년 여름. 제작진은 세 번째 이야기를 준비하면서 하나 씨와 엄마가 어디에서 어떻게 만나야 가족 모두에게 행복한 기억으로 남을지를 고민했다. 시집와서 40년을, 이사 한 번 하지 않고 내내 살았던 인천의 이층집. 그중에서도 엄마가 좋아하던 곳은 마당의 꽃밭이었다. 봄이면 장미와 샐비어가 만발하던 꽃밭. 매년 5월이면, 하나 씨 가족은 엄마가 정성스레 가꾸던 꽃밭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엄마가 떠나시자 돌보는 사람 없는 꽃밭이 망가지기 시작했다. 당연히 그곳에서 사진을 찍을 일도 없었고, 가족들은 서로 서먹서먹해지기 시작했다. 모두를 돌봐주던 엄마로 인해 가족이 함께할 수 있었음을 이제야 알았다. 제작진은 VR 공간에 엄마의 꽃밭을 만들고, 그곳에서 엄마와의 소소하지만 소중했던 일상을 체험.. 2022. 11. 15.
05. 보호자란 이름으로 보호자. 보호자란 사전적으로 ‘어떤 사람을 보호할 책임을 가지고 있는 사람’(출처: 네이버어학사전, “보호자”)을 뜻한다. 이런 보호자는 요양병원 환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존재다. 병원비를 내고, 간식과 물품을 보내고, 외진 시 동행하는 현실적 필요뿐 아니라, 치료의 영역에서도 보호자의 선택과 결정이 필요할 때가 있다. 보호자가 없거나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경우 의료진 역시 난감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보호자의 존재는 환자의 정서적 지지와 안정에 절대적 역할을 한다. 연세 드신 부모를 자녀가 반드시 부양해야 한다는 전통적 인식도 변하고 있다. 과거에는 독거노인을 사회 문제로 바라보았지만, 현재에는 보편적인 현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 자녀는 부모의 부양을 필수가 아닌 선택으로 생각하고, 신세대 부모 .. 2022. 11. 15.
04. 몇 십 년이 지나도 잉꼬부부. 남편만 바라보는 바라기 할머니 하얗고 고운 얼굴의 바라기 할머니는 여러 번 큰 수술을 하고 요양병원에 입원하셨다. 한없이 약해진 몸으로 휘청휘청 걸으면서도 남편을 찾아 밤낮으로 병원 복도를 배회하셨다. 자신을 기다리는 이런 아내의 마음을 잘 알기에 할아버지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매일같이 면회를 오셨다. 침상 옆에 앉아 아내의 손을 꼭 잡고 기도하신 후 함께 커피믹스를 마시는 시간이 노부부에게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일과였다. 아내를 수년간 간병하면서도 할아버지는 매번 온화한 미소와 다정한 당부를 잊지 않으셨다. 치매로 어린아이가 되어 버린 아내를 달래고 위로하며 따뜻한 보호자가 되어 주셨다. 그런데 다정한 부부의 오작교가 되었던 병실 면회가 코로나 사태 이후 금지되었다. 할아버지가 오지 못하면서 바라기 할머니는 점점 말이 없어지고 누.. 2022. 11. 14.
09. VR 저널리즘_용균이를 만났다, 다른 사람의 기억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첫 번째 방송 이후에 조금 더 새로운 영역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하늘에 있는 가족을 만나는 경험을 사회적으로 가치 없다고 비난해준 분에게도 고마운 마음이었다. 시즌1에서 엄마와 나연이의 사연을 같이 지켜보고, 그 느낌을 전달한 것은 평생 만나기 힘든 아름다운 경험이었고, 자신의 감정을 떠올리고 의미를 찾아준 시청자분들에게도 너무나 감사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VR로 누군가를 만난다’는 개념 이 조금 더 다양한 가능성을 가진 것인지 시험해보고 싶었다. ‘휴먼 스토리를 너무 신파적으로 연출하는 게 아니냐, 과연 그런 기술의 결합이 사회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느냐’라는 말에 대한 답을 프로그램으로 대신하고 싶었다. 교양 프로그램을 생산하는 이곳을 이끌어온 한 축이 사람의 이야기 (휴먼 스토리)라면,.. 2022. 11. 14.
03. 생로병사를 이겨내는 작은 꽃들 보호자 선생님, 제 동생 잘 부탁드립니다. 영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보호자 낫게만 해주시면 제가 선생님 옷 한 벌 해드리고 잔치도 크게 할게요. 꽃님 씨의 보호자인 오빠께서 면회를 오셨다. 우연히 마주친 나에게 여동생의 치료를 부탁하신다. 꽃님 씨의 오빠가 면회하러 온 날은 병실이 화분과 꽃다발로 꾸며진다. 보통의 보호자들은 환자에게 주로 간식을 보내지만, 꽃님 씨의 보호자는 항상 꽃을 보내신다. 덕분에 사계절 내내 병원에서 꽃을 구경할 수 있다. 오늘은 꽃님 씨의 기분이 저기압이다. 나의 안부 인사에 눈길도 주지 않는다. 꽃님 씨는 우리 병원에서 가장 젊은 환자이다. 단발머리에 동그란 얼굴의 그녀는 실제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인다. 요양병원 근무 10년 차인 내 눈에도 80~90대의 노인 환자가 대부.. 2022. 11. 13.
08. 버츄얼 휴먼으로 스킨십을 흉내 낼 수 있을까? 아이들도 기억하는 부부의 사랑을 뽀뽀와 같은 스킨십으로 흉내 내 볼 수 있을까? 그것도 그리움을 표현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러나 현실적으로 촉감 구현이 가장 어렵다. 가상체험에서 몰입감과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가장 큰 요소가 ‘대상과의 상호 작용’이다. 몸짓, 눈맞춤, 무언가를 건네거나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현실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이번에는 어떤 상호 작용을 통해서 아내를 그리워하는 체험자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을까? 아내를 안아보고 싶은 마음을 어떻게든 비슷하게라도 구현하고 싶었다. 우리는 손과 눈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장갑과 HMD에 대상(버츄얼 휴먼)이 따라가고 반응할 수 있는 주요 트래커가 부착해 있고, 체험자의 움직임을 반영할 수 있었다. 부부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이 무기를 어떤.. 2022. 11. 13.
07. 시즌2_‘로망스’ VR로 이루어진 단 하루의 만남, “거기 있나요? 내가 왔어요.” 프로그램을 마치고 아이와 제주해녀박물관을 찾았다. 그곳에서 나는 VR이나 AR을 결합해 할 수 있는 일들을 상상했다. 예를 들어, 어두운 공간에서 시작해 파도가 치고 바닷속이 느껴지는 영상, 소리, 냄새 등이 나를 감싼다. 그리고 그곳에 한 소녀가 등장한다. 할머니의 이미지로 남은 해녀가 아니라 철없는 소녀가 등장해 한국의 근현대사를 거치며 할머니가 되어간다… 이런 스토리를 평생 함께하는 아름답기도 하고 무섭기도 한 바다의 이미지와 함께 풀어낼 수 있다면. 시간 여행 후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박물관을 나갈 수 있다면 좋겠다. 이런 거, 언젠가는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이즈음에는 코로나가 심해지면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고, 원격 회의가 일반화되고, 메타버스 관련주가 폭등하고 있었다. 이왕 발을 .. 2022. 11. 12.
02. 요양병원에서 근무하면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은 언젠가요? 10년간 요양병원에서 근무하며 가장 행복했던 시간을 꼽으라면, 아이를 품었던 열 달의 기간이다. 많은 사람이 마흔 살 임산부의 노산을 걱정하였다. 허리를 굽혔다 펴는 일의 연속인 한 의사의 노동과 예민하고 고통스러운 입덧을 안쓰러워했다. 하지만 나는 임신 초기, 입덧으로 축 늘어져 있다가도 회진만 하러 가면 희한하게 힘이 났다. 밥을 못 먹어 위장이 꼬이고 기운이 없는 데도 환자 얼굴만 보면 생글생글 미소가 지어졌다. 체질상 요양병원의 한의사가 맞나 보다 생각했다. 입덧이 끝나고 태동의 시기가 왔다. 유산한 적이 있어서 산부인과 정기검진 때마다 초음파 모니터를 똑바로 보지 못했다. 쿵쿵. 아이의 힘찬 심장 소리를 들은 후에야 겨우 실눈을 뜨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어느 날, 작은 생명의 생존을 가슴 졸.. 2022. 11. 12.
06. 사랑하는 그대를 나 기억해요... 심금을 울린 <너를 만났다> 테마곡 사랑 사랑하는 그대를 나 기억해요 우리의 사랑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언젠가 모두 사라지겠죠 그래서 나 노래해요 영원히라 믿는 노래로 그대를 _강아솔 ‘Dear’ ‘어떻게 이런 음악과 가사가 있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하늘에 있는 가족을 가상현실에서 잠시 만난다는 이 프로젝트를 위해 기다린 노래 같았다. 우리 둘의 일을 아는 모든 사람이 사라진다는 것은, 시간이 흐르고 지금 이 지구의 모든 사람도 죽고 없어지는 것… 우주의 나이에 비하면 인간의 삶이 얼마나 짧은지, 이상하게도 기억에 관해 생각할수록 시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Dear’는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생각했던 시간과 기억에 대한 느낌을 너무나 짧은 가사로 잘 표현하고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너, 우리가 사랑한 너랑 나 둘의 기억만큼은 영.. 2022. 11. 11.
01. 치열한 노년의 삶 아무리 가까이에서 늙음과 병듦, 죽음을 관찰해도 아직은 노년의 삶이 제삼자의 일처럼 느껴진다. 다만, 영원히 늙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젊은 날을 조금 더 의미 있게 살아야 한다는 것과 늙고 병들고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에는 반드시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요양병원에서 늙음을 관찰하며 한 가지 결론을 얻었다. 늙는다는 건 젊은 날을 살아냈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죽지 않고 살아남았기에 젊은 시절을 보내고 오늘날까지 늙을 수 있는 것이다. 다리가 불편해서 늘 휠체어에 앉아 계신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강제 징용되어 일본으로 끌려가셨다가 함께 간 사람 중 유일하게 살아남으신 그 옛날을 회상하신다. 또, 다섯 남매를 낳아 기르고 농사짓고 살림하느라 허리가 굽어 침상에 제대로 눕지 못하시는 할.. 2022. 11. 11.
05. 나연이 버츄얼 휴먼에 도전, 모션캡처가 뭐에요? 나연이의 버츄얼 휴먼이 완성되고 있었다. 이제 모션 캡처를 할 차례다. 모션 캡처용 수트를 입은 배우의 동작을 따서 그 데이터로 캐릭터를 움직여야 한다. 이렇게 녹화된 동작 그대로 엄마와 만남이 이루어진다. 동작을 맡은 배우는 아이의 사진과 동영상을 연구하며 의욕적으로 참여해 주었다. 모션 캡처 전에 아이를 오랫동안 돌봐주셨던 유치원 선생님을 섭외해 아이의 동작을 세심히 물어보기도 했다. 아이가 어떻게 걷는지, 어떻게 뒤돌아보는지, 어떻게 웃는지 등을 배우가 시연하면 선생님이 수정하는 방식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닮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시간이다. 나연이의 유치원 선생님은 성심껏 모든 동작을 기억해 우리에게 도움을 주었다. 인터뷰는 한사코 사양했다. 속으로 내내 울고 계셨던 것 같다. 나연이가 달려와 안.. 2022. 11. 10.
00. <저는 부모님을 요양병원에 모시려고 합니다> 연재 예고 요양병원 한의사가 10년간 환자의 생로병사를 지켜본 삶의 기록! 지인들이 저에게 호기심 반, 두려움 반의 눈빛으로 하는 질문입니다. 그 지인이 2050세대라면 호기심의 마음이 조금 더 크게 느껴지고, 6080세대라면 두려움의 마음이 조금 더 크게 느껴집니다. 간혹 요양병원의 열악한 환경을 고발하는 뉴스를 보고는 “나는 늙고 병들어도 절대 요양병원에 가지 않겠다.”라며 애써 피하는 분도 계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호기심과 두려움, 회피하려는 마음은 아직 요양병원이라는 미지의 공간에 가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양병원은 누군가에게 호기심의 대상이거나, 상상하기도 싫은 두려운 미래의 공간이지만, 그곳의 환자분들에게는 오늘을 살아가는 치열한 삶의 현장입니다. 그리고 저는 매일 그분들과 함께 현장을 누비는 요양병원.. 2022. 11. 9.
05. 핵무기만큼 무서운 핵황달 (마지막 회) 결혼 후 새신부에게 시련이 찾아왔다. 첫 아기를 얻은 기쁨도 잠깐, 아기 몸 전체가 노랗게 변한다. 처음에는 많은 아기에게 나타나는 생리적 황달이겠거니 생각하였는데, 아기 눈의 흰자위까지 노랗게 변했다. 소아과 진료를 하니 핵황달일 가능성이 높아 입원을 한다. 핵황달은 황달이 뇌까지 침입하여 뇌성마비까지 일으키는 무서운 병이다. 입원 후 핵황달을 치료하기 위하여 아기 피를 모두 빼내고 새로운 피로 바꾸는 교환수혈까지 하게 되었다. 여기서 예기치 못한 새신부의 결혼 전 사건이 알려지게 된다. 아기의 핵황달 치유 과정에서 산모의 결혼 전 낙태 경험이 밝혀지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신생아 핵황달은 첫 임신에서는 발생하지 않고 두 번째 임신한 태아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아기의 황달로 인하여, 결혼 전 첫 임신.. 2022. 11. 9.
04. 메타버스 기술이 아니라 사람에 관한 연구가 더 필요한 게 아닐까? 나연엄마는 아이폰으로 아이의 사진을 많이도 찍었다. 다 정리하지 못한 사진들을 외장하드에 몇 테라나 갖고 있었다. 마침 정리해 보고 싶었다며 건넨 그 외장 하드 속 사진과 동영상을, 우리는 끝없이 들여다보았다. 덕분에 사람의 외모를 비슷하게 표현하기 위한 다양한 각도의 사진을 어렵지 않게 골랐다. 그러나 살아 있는 어떤 사람을, 그것도 누군가와 만나는 순간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그 이상이 필요했다. 버츄얼 휴먼이라고 해도 움직이고 표정을 지으면 자아를 가진 존재처럼 보인다. 게다가 우리는 엄마를 실시간으로 만나는 딸을 재현해야 한다. 단순히 외모만 재현하는 일이라면 데이터로 이루어진 마네킹을 만들면 되고, 후보정이 가능한 3D 영상을 만드는 일이라면 마음이라도 편했겠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리 단.. 2022. 11. 9.
03. 시즌1_나연이네 가족, 낯선 VR와의 첫만남 사실 이 일을 하면 누군가를 잃은 사람을 너무 많이 만난다. 그래서 이런저런 사연에 둔감해지고,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고 아이템이 될까 안 될까를 고민하는 자신의 모습에 놀라게 된다. 그런데 그날은 그냥 들었다. 너무 맑은 날에, 나연엄마가 눈물을 흘리면서 인생이 실패로 느껴진다고 했다. 아이를 잃으면 엄마는 그냥 슬프기만 한 게 아니었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고, 자기 자신을 손가락질하는 인간이 된다. 이상하게 화가 났다. 나라면 어떨까. 아이를 지키지 못했을 때, 나라면 누구를 손가락질할까. 나와 비슷한 연배인 나연엄마는 90년대 개그감을 갖고 있어서 대화하며 자주 웃었다. 그런데 왜 나연엄마는 아이를 잃고 3년 동안, 그렇게 아픈 기억을 기록하고 있었을까. 나연엄마는 농담처럼, 이제 갱년기가 오는.. 2022. 11. 8.
04. 인생에서 처음 만나는 고난 요사이 부고를 받다 보면 100세까지 장수하신 분들의 부고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 통계청이 발표한 한국인의 기대 수명은 83.5세이다. 기대수명이란 출생한 신생아가 앞으로 생존할 것으로 기대되는 평균 나이를 말한다. 일본인의 기대수명이 84.4세로 세계에서 가장 최장수 국가이다. 《동의보감》을 집필한 허준의 시대에 조선 사람 평균수명이 30대였다. 조선의 왕들의 평균수명은 46세였다. 21대 영조가 가장 장수하여 82세까지 생존하였다. 과거 조선시대 가장 흔한 사망 원인이 전염병이라고 추측된다. 1895년 당시 조선의 수도 한성의 인구가 22만 명이었는데 호열자라고 부르는 콜레라가 유행하여 한성에서만 5천 명이 사망하였다. 당시에는 세균에 대한 존재도 모르던 시기였기에, 콜레라는 쥐 귀신에 의하.. 2022. 11. 8.
03. 손 씻기가 살린 아기들 “선생님, 저희 간호사들 핸드로션 좀 사주세요.” 나에게 신생아집중치료실 간호사들이 회진 중에 간곡하게 부탁한 말이다. 손이 가마니처럼 거칠어져서 핸드로션을 사달라고 요구한다. 신생아집중치료실 간호사와 전공의들이 손바닥에서 손금이 안 보인다고 항의한 적도 있었다. 너무 손을 자주 씻다 보니 일어난 일이다. 특히 간호사들에게는 아기 기저귀를 갈 때마다 손을 씻으라고 하였기에 하루에도 수십 번씩 손을 씻게 되었고, 그 결과 손이 거칠어지고 손금까지 보이지 않는다고 과장 섞인 불평을 하게 된 것이다. 미국 우먼앤드인펀츠병원에서 연수할 때 신생아집중치료실 회진에 처음 참여한 날이었다. 집중치료실 회진팀은 주치의 교수, 전임의, 전공의, 간호사, 호흡치료사, 영양사, 그리고 사회사업가 등 6~7명으로 구성된다. .. 2022. 11. 7.
02. 테크놀로지, 빅테크, VR 엔진.... 기억을 과학기술로 구현할 수 있을까?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스마트폰과 카카오톡이 나온 게 2008년쯤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그때 나는 이미 7년 차 PD였다. 테크놀로지라는 단어를 뭔가 어렵고 SF적인 것으로 느끼며, 우리의 삶과 결합한 약간 소프트한 느낌의 테크놀로지는 생각하지도 못 했다. 방송은 서서히 기울어갔다. 네이버와 카카오같이 개발자를 보유하고 삶의 영역을 바꾸는 빅테크 기업을 방송사와 비교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 되었다. 그래도 를 만들며 외부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계속 업데이트되는 신기술을 받아들이고, 될 만한 아이템을 찾는 일은 다이내믹했다. V사와 최종 계약했다. 방송이 나간 뒤에는 둘 다 웃을 수 있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미안한 금액이고, 무모한 도전이었다. 의기투합했던 나날을 생각하면 웃음이 난.. 2022. 11. 7.
01. 삶이란 너랑 했던 일들의 기억 VR 기술을 어떻게 결합할 생각을 했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그때마다 다른 대답을 한 것 같은데, 사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다만 ‘어떤 공간 안에서 헤어진 가족을 다시 만난다면’이라는 기획안을 쓰긴 했다. 자신은 별로 없었다. 기획을 꺼내면 접어야 할 이유가 할 이유보다 많은 법이다. 가장 구체적인 부정적 반응은 “HMD를 쓰고 있으면 표정이 안 보이는데 감정이 전달되겠냐”라는 반응이었다. 맞는 말이라 뭐라 하기도 어려웠다. 이런 말들을 들으면 “아무래도 그렇지” 하고 접을 생각부터 하게 된다. 그로부터 1년 후, 코로나가 막 유행하던 2020년 1월에 의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홍보 자료에 VR과 휴먼 스토리의 결합이라고 해서인지 많은 기자가 와주었다. 프로그램을 소개하는데 긴장해서 적어온 말들을.. 2022. 11. 6.
02. 태아와 엄마는 한 몸 결혼식을 마친 부부는 일생의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하기 위하여 신혼여행을 떠난다. 신부는 사랑하는 새신랑과 함께 술잔을 들고 사랑의 언약을 속삭인다. 때로는 신랑 신부 친구들과 함께 술파티를 즐기며 과음을 하기도 한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후에도 신혼의 무드를 즐기려고 저녁식탁에서 자주 포도주를 마신다. 음주가 식사처럼 일상화된 시대에 살고 있다. 점심시간에 시내 식당에 들르면 테이블마다 소주나 맥주로 반주를 즐기는 모습을 자주 본다. 여성들만 모인 식탁에서도 소주병이 보인다. 평등을 중시하는 세상이지만 음주에서만은 평등을 외치고 싶지 않다. 특히 신혼이나 임신을 원하는 가임연령 여성에게는 남성과 달리 금주가 요구된다. 태아 알코올 증후군(fetal alcohol syndrome)은 임신 중에 어머니가 마.. 2022. 11. 6.
00. <너를 만났다> 연재 예고 MBC 창사 60주년 VR 휴먼 다큐멘터리 대기획 ***** 2020년 ABU 다큐멘터리 부문 대상! ***** 2021년 프리 이탈리아 스페셜 멘션상! ***** 유튜브 3천만 뷰 VR 휴먼 다큐멘터리 화제의 방송!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기술의 힘을 빌려 하늘나라에 있는 가족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기술의 힘을 빌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어떤 수식어도 없는 이 문장이 〈너를 만났다〉의 카피였다. 처음 시도하는 프로그램이었고, 2020년 2월 인간적인 시선과 과학기술의 완벽한 조합으로 이뤄낸 MBC 〈너를 만났다〉시리즈 1,2,3을 한 권에 담아 책으로 만나게 되었다. 딸을 잃은 나연엄마의 이야기로 엄마의 사랑 이야기를, 아내를 잃은 정수 씨의 이야기로 남녀의 .. 2022. 11. 5.
01. 환자와 대화할 수 없는 의사 “환자는 원래 아픈 거예요.” 환자들이 의사들에게서 듣는 섭섭한 말 중의 하나다. 환자는 아프지 않으려고 입원까지 했으니까. 그러나 최근 병원에서는 환자의 통증 해결을 가장 중요한 진료 목표로 삼고 있다. 아프지 않으려고 입원했는데 아픔의 호소를 방치하거나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통증도 심한 정도에 따라 10단계로 나누어 세심하게 환자의 통증을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입원환자들이 아픔을 호소할 때 ‘콕콕 쿡쿡 쑤시며 아프다’, ‘무지륵하게 아프다’ 등등 아픔의 표현도 다양하다. 입원환자를 회진하다 보면 주치의사와 입원환자 간에 많은 대화가 이루어진다. 회복이 순조롭게 진행되면 감사 인사를 받기도 하지만, 때로는 옆 환자의 신음소리에 대한 불편한 이야기들도 나누게 된다. 장기간 입원하는 환자들과는 자녀.. 2022. 11. 5.
00. <세상이 궁금해서 일찍 나왔니?> 연재 예고 이른둥이의 탄생을 바라보는 노의사의 따뜻한 시선 이 책은 생명 탄생의 소중함을 전하는 글입니다. 태어나서부터 생후 4주 미만의 신생아나 미숙아를 진료하는 신생아 진료 전문 의사인 저자는 평생 진료하면서 한 번도 자신의 환자와 대화할 수 없었습니다. 신생아들은 태어나는 순간 천지개벽과 같은 엄청난 생리적 변화를 겪습니다. 태아는 엄마의 자궁 내에서 편안하면서도 100% 의존적인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분만실에서 엄마와 분리되는 순간부터 완전 독립적 인생을 시작하여야 합니다. 대부분 독립적 인생의 출발 과정이 순조롭습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새 인생의 출발을 순조롭게 출발하지 못하는 아기들도 많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신생아 특히 몸무게가 1kg도 되지 않는 극히 작은 미숙아들을 진료하는 과정의 희.. 2022. 11. 4.
10. 언니는 언니 없이 어떻게 버텼을까? (마지막 회) “오늘이 학교 가는 마지막 날이라는 마음으로 열심히 공부해. 엄마랑 언제 한국에 돌아가야 할지 모르니까.” 예전에는 홍콩에서 국제 학교에 다니는 아들에게 이런 당부를 했다. 당시 국제 학교를 보내는 비용은 그렇게 저렴하지 않았다. 사업이 잘 되지 않으면 아이들의 교육을 책임질 수 없을 것 같았다. 사업이 잘 안 되면 내가 책임지고 있는 직원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불안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아이들은? 내가 그렇게 말하면 아이들은 해맑게 묻곤 했다. “한국에 가서 엄마는 뭘 할 건데요?” “글쎄. 아들들 좋아하는 치킨 장사를 할까?” 치킨을 팔겠다는 건 작은 사업을 하겠다는 게 아니라, 아들이 좋아하는 걸 만들어 주고 싶다는 농담에 가까웠다. 그러면 아들은 이렇게 받아치곤 했다. “샌드위치 장사가 더 좋아요.. 2022. 9. 8.
09. 다시 물 위로 떠오르기 위해, 천천히 뛰어들고 천천히 떠오르기 우리는 일단 얕은 물에서 장비를 사용하는 법과 착용하는 법 등을 배웠다. 산소통을 메는 방법과 2인 1조로 움직여야 한다는 팁도 알게 되었다. 산소통 중 하나가 망가지더라도 다른 사람의 산소통에 의지해서 나올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소통에는 다른 사람이 호흡할 수 있도록 호스를 연결할 수 있는 호스 연결점이 하나 더 나 있다. 둘이 짝을 지어 내려가야만 위험을 줄일 수 있다니. 이건 꼭 삶에 대한 비유 같았다. 우리는 의지할 사람을 꼭 붙들고 서로 기대어 살아가지 않나. 물속에 들어가서 종소리를 듣는 훈련도 받았다. 물속에서는 밖의 소리가 잘 들리지 않으므로 위험을 알리거나 급히 올라와야 할 일이 생길 때는 종을 울린다. 물속에서 방향을 알려 주는 것도 종소리기에, 종소리가 곧 생명 줄이 될.. 2022. 9. 7.
08. 인간은 기대를 먹고사는 존재다. 꼬르륵. 이런 소리가 나는구나. 물속에 몸을 던지며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밖에서 사람들이 물속으로 몸을 던지는 것을 보았을 때 들었던 소리는 ‘풍덩’이었는데, 정작 물속에 들어간 사람이 듣는 소리는 자신의 숨소리뿐이다. 발을 떼기까지는 큰 용기가 필요했다. 들어갔는데 이퀄라이징이 안 되면 어쩌지? 내가 패닉에 빠지지는 않을까? 물속에 뭐가 있을 줄 알고? 그러나 막상 물 안에 몸을 던지자 저 육지 세상보다 더 큰 평온이 찾아왔다. 엄마의 배 속에 있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고요했다. 엄마의 배 속에 있을 때 아이들이 바깥 소리를 이렇게 듣는다는 이야 기를 들은 적이 있다. 아주 작게 웅얼거리는 소리처럼 말이다. 물속에 들어가자 새 소리도, 파도 소리도, 사람들의 환호 소리도 아득했다. 그래. 내겐 이.. 2022. 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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