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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세이/<저는 부모님을 요양병원에 모시려고 합니다>

02. 요양병원에서 근무하면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은 언젠가요?

by BOOKCAST 2022.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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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간 요양병원에서 근무하며 가장 행복했던 시간을 꼽으라면, 아이를 품었던 열 달의 기간이다. 많은 사람이 마흔 살 임산부의 노산을 걱정하였다. 허리를 굽혔다 펴는 일의 연속인 한 의사의 노동과 예민하고 고통스러운 입덧을 안쓰러워했다. 하지만 나는 임신 초기, 입덧으로 축 늘어져 있다가도 회진만 하러 가면 희한하게 힘이 났다. 밥을 못 먹어 위장이 꼬이고 기운이 없는 데도 환자 얼굴만 보면 생글생글 미소가 지어졌다. 체질상 요양병원의 한의사가 맞나 보다 생각했다.

입덧이 끝나고 태동의 시기가 왔다. 유산한 적이 있어서 산부인과 정기검진 때마다 초음파 모니터를 똑바로 보지 못했다. 쿵쿵. 아이의 힘찬 심장 소리를 들은 후에야 겨우 실눈을 뜨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어느 날, 작은 생명의 생존을 가슴 졸이며 걱정하던 엄마에게 아기가 똑똑똑 아랫배를 노크하며 수줍게 첫인사를 건넸다. 배가 조금씩 불러올수록 아기는 넓어진 놀이 공간에서 슈웅슈웅 헤엄치며 자신의 건재를 알렸다. 그러다가 회진 시간만 되면 얌전해졌다. “엄마는 나를 신경 쓰지 말고 일 열심히 해요.”라는 말이 탯줄을 타고 귀에 들리는 듯하였다.

시간이 흘러 만삭이 되자, 병동의 할머니들 모두 내 임신 사실을 알게 되셨다. 내가 병실에 들어서면 모두 함박웃음으로 반겨주셨고, 아픔으로 고통스러운 얼굴을 하고 계시다가도 나만 보면 아니, 내 배만 보면 싱글벙글하셨다. 문을 열고 쑥 들어오는 만삭의 배는 할머니들 기억의 방아쇠가 되어 그 옛날 자신들의 출산과 육아 이야기를 소환하였다.

아기는 나에게 엄마라는 이름도 선물했다. 아기에게 “엄마”라는 부름을 처음 들었던 날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러나 육아는 기쁨이 큰 만큼 피로감도 컸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엄마의 일에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다. 나는 이 과정을 통해 세상 사람 모두 누군가의 희생과 사랑으로 성장하여 살아가는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자식이 장성하면 그만큼 엄마는 늙는다. 요양병원의 늙고 병든 엄마들은 여전히 자나깨나 자식 생각뿐이다. 낯선 병원에 입원했다는 불평보다 자식들에게 병원비가 부담될까 걱정하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 또, 엄마가 쓸데없이 오래 살아 자식들이 고생 한다며 자신의 장수를 탓하시다가도 사진 속의 아들 자랑, 딸 자랑, 손주 자랑에 행복해하셨다.

꼼짝없이 누워 지내는 병상에서도 자식을 위한 기도 소리는 끊이지 않는다. 엄마는, 늙은 엄마는 그렇게 죽는 날까지 죽을힘을 다해 자식을 사랑한다.

나도 언젠가 요양병원의 어르신들처럼 나이 든 엄마가 될 것이다. 그 노년의 침상을 가득 채워 줄 아이와의 소중한 추억을 많이 만들고 싶다. 고된 육아의 시기도 다시 오지 않는 시절임을 알고 감사히 여기겠다. 그리고 노후를 맞이하였을 때, 부족한 엄마에게 와서 잘 자라준 것만으로도 효도를 다했다고 꼭 말해줄 것이다. 늙은 엄마를 봉양하는 데에 너무 많은 힘을 쓰기보다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살기 위해 노력하기를 당부하고 싶다.

언젠가 회진 중 할머니 한 분이 나를 “애기 엄마!”라고 부르셨다. 평소 선생님으로 불리기에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그 정겨운 부름에 환하게 웃으며 “네! 애기 엄마, 김영맘 여기 있어요!”라고 대답했다.

할머니들과 나, 우리는 ‘엄마’라는 영원한 직업을 가졌다. 젊을 때는 정성껏 자식을 키우는 애기 엄마, 늙었을 때는 자식이 장성한 만큼 노쇠하고 주름진 엄마, 세상을 떠난 후에는 그리운 엄마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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