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에세이/<너를 만났다>

04. 메타버스 기술이 아니라 사람에 관한 연구가 더 필요한 게 아닐까?

by BOOKCAST 2022. 11. 9.
반응형

 


 

나연엄마는 아이폰으로 아이의 사진을 많이도 찍었다. 다 정리하지 못한 사진들을 외장하드에 몇 테라나 갖고 있었다. 마침 정리해 보고 싶었다며 건넨 그 외장 하드 속 사진과 동영상을, 우리는 끝없이 들여다보았다. 덕분에 사람의 외모를 비슷하게 표현하기 위한 다양한 각도의 사진을 어렵지 않게 골랐다. 그러나 살아 있는 어떤 사람을, 그것도 누군가와 만나는 순간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그 이상이 필요했다.

버츄얼 휴먼이라고 해도 움직이고 표정을 지으면 자아를 가진 존재처럼 보인다. 게다가 우리는 엄마를 실시간으로 만나는 딸을 재현해야 한다. 단순히 외모만 재현하는 일이라면 데이터로 이루어진 마네킹을 만들면 되고, 후보정이 가능한 3D 영상을 만드는 일이라면 마음이라도 편했겠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엄마가 만날, 가상공간에서 실시간으로 표정을 짓고, 말하고, 교감하는 존재는 어떠해야 할까.

⑴ 실제 인물과 매우 닮아야 한다.
⑵ 기억 속 나연엄마만 아는 특징적인 모습을 보여야 한다.
⑶ 실시간으로 살아 움직여야 한다.

3번은 아직 어디에서도 한 적이 없는 작업이다. VFX 업체들이 익숙하게 만드는 게임 홍보 영상 속 가상의 캐릭터를 만드는 난이도와 비교할 수 없었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이 아티스트들이 어려워하면서도 의욕이 넘친 이유다.

PD가 할 일은 더 있다. 매일 사진과 동영상들을 보며 아이를 생각했다. 어떤 아이였을까? 허스키한 목소리, 동그랗게 뜬 눈, 토라지다가도 금방 반달 모양으로 웃는 눈… 그리고 계절이 느껴지는 사진들에 마음을 사로잡혔다. 여름이나 겨울, 쑥쑥 커가는 아이가 계절이 느껴지는 배경 속에서 엄마와 웃고 있는 모습을 계속해서 보았다. 보고 있으면 그 순간의 냄새나 바람 같은 것이 느껴졌다. 어떻게 해야 나연엄마 기억 속의 나연이를 생생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내가 아는 사람의 나만이 아는 특징을 상상해 보았다. 예를 들어, 아이가 나를 보면서 웃을 때의 특징적인 표정이나 손동작, 몸을 기울이는 각도, 리듬… 이런 것들을 찾아서 표현할 방법을 찾으려 했다. 아티스트와 테크니컬 디렉터가 가장 어려워하는 것 중의 하나가 사람의 큰 동작이나 화려한 움직임이 아닌, ‘아이들링(Idling)’이라 부르는 상태다. 큰 동작이나 상호작용 사이에 있는 머무름. 대답을 기다리기도 하고 상대를 가만히 쳐다보기도 하는 ‘아무것도 안 하는 상태’. 그것을 표현하는 게 정말 힘들었다. 사실 우리가 보는 영화, 드라마, 게임 속의 인간을 닮은 캐릭터는 큰 액션 위주로 넘치는 감정을 표현한다. 장르도 어드벤처나 액션물이다. 즉, VFX 기술에 가장 큰 자본이 투입되는 영화 산업에서는 가만히 있는 평범한 인간을 만들 이유가 별로 없다. 미세한 사람다움, 미세한 감정을 보여 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노하우가 상대적으로 축적되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아무튼 기술이 발전해도, 고작 몇 초라도 나를 바라보는 자연스러운 버츄얼 휴먼을 만드는 일은 쉽지 않다.

많은 사람이 미래에는 메타버스 안에서 디지털 아바타를 통해 새로운 인간관계가 만들어질 거로 예측한다. 그러나 나의 또 다른 자아인 아바타를 만들어 다른 아바타와 깊은 감정을 나누려면, 기술이 아니라 사람에 관한 연구가 더 필요한 게 아닐까. 어쩌면 메소드 연기전문가가 필요할지 도 모르겠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