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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세이/<저는 부모님을 요양병원에 모시려고 합니다>

07. 이제는 만날 수 없는 할매에게

by BOOKCAST 2022.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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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매는 굳센 바위 같은 사람이었다. 모진 세월의 비바람을 맞고도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제자리에 서 있는 바위. 열아홉 살 전쟁미망인은 자신 앞에 놓인 운명을 받아들이고 어린 아들과 살아남기 위해 가장 단단한 바위가 되었다. 세상사 웬만한 일에 눈도 깜짝 안 하셨고 싸늘한 눈가에는 눈물이 말라 흐르지 않았다.

어느 날 그 바위틈에서 여린 풀이 자라났다. 차갑게 메말랐던 바위는 그 풀잎을 금지옥엽처럼 여기고 사랑했다. 나는 할매의 첫 손녀였고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성장했다. 우리는 25년을 한집에서 살았다. 25년째 되던 해 어느 여름날이었다.

영맘 할매! 할매! 엄마, 할매는?
엄마 할매 2층에 계신다. 요즘 자꾸 2층 소파에 누워만 계시네.

할매가 어느 날부터 2층 소파에 누워만 계셨다. 아픈 데는 없는데 온몸에 힘이 없다고 하셨다. 식사하실 때 잠시 1층으로 내려오셨다가 몇 술 뜨시고는 다시 2층으로 올라가셨다. 평소 입맛이 좋아 골고루 잘 드시고, 목소리 크고, 잔소리 많던 할매가 갑자기 밥도 안 드시고 말도 안 하시고 누워만 계셨다. 그래도 나는 크게 걱정하지 않고 학교 기말고사와 여름방학 성당 행사에만 신경 썼다. 평소처럼 며칠 아프시다가 툭툭 털고 일어나 언제 그랬냐는 듯 씩씩하게 운동하고 마실가고 집안일을 하실 거라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할매를 모시고 병원에 다녀오셨다. 시험을 끝내고 여름방학을 기다리던 나에게 엄마가 말씀하셨다. 할매가 암이라고, 췌장암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예과 시절이라 잘 몰랐지만, 췌장암은 암 중에서도 가장 고통스럽고 예후가 나쁜 암이라고 들었기 때문이다. 3대가 모여 오순도순 별 탈 없이 살던 우리 가족은 갑작스러운 할매의 병환에 슬퍼할 겨를도 없이 간병을 시작했다. 할매는 집에서 치료받기를 강력히 원하셨다.

아버지가 생계를 위해 회사에 다니는 동안, 엄마가 살림과 간병을 맡았다. 할매의 소식을 듣고 멀리서 살던 할매의 막냇동생인 이모할머니도 간병을 도우러 오셨다.

우리 가족은 할매에게 병명을 알리지 않았다. 그래서 할매는 병을 잘 알지 못했고 곧 회복될 거라고 생각하셨다. 이것저것 드시고 싶어 했지만, 막상 몇 입 드시면 구토를 하셨다. 통통한 체격이었던 할매는 두 달 사이에 반쪽이 되었고, 병세가 악화하면서 복수가 차올랐다. 병원 진료는 아버지가, 가정 간병은 엄마와 이모할머니가 전담했다. 이모할머니는 할매와 함께 주무시며 목욕, 식사 보조, 대소변 처리까지 24시간 돌보셨다. 나는 가끔 할매의 안부를 살피러 안방에 들어가는 방관자가 되었다. 편찮으신 할매가 얼른 회복하시길 간절히 바랐지만, 간병 노동에는 부담을 느끼는 이중적인 태도였다. 그래도 할매는 섭섭해하시기는 커녕 혹시나 손녀에게 병을 옮길까봐 가까이 오는 것조차 제지하시며, 자신이 쓴 물품을 소독하라고 몇 번이나 당부하셨다.

할매는 병원 입원을 끝까지 마다하셨다. 복수를 제거하거나 진통제와 수액을 처방받기 위한 때를 제외하고는 가정 간호를 받으셨다. 20여 년 전에는 암 환자를 위한 호스피스 병원이나 요양병원 개념이 생소하였고, 방문간호도 없던 때라 대학병원 입원을 마다하시면 가정 간호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나는 한 집에서 할매의 변해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할매의 죽음을 애써 외면했다. 그해 여름 석 달 꼬박, 이별을 준비할 시간을 주셨음에도 현실을 외면하고 부정하며 간병에 태만했던 나는 한순간에 할매를 잃은 것만 같았다. 구급차에 실려가시던 모습이 마지막인 줄 알았다면, 이별은 갑자기 찾아온다는 걸 알았다면, 한 번만 더 할매의 얼굴을 만져보고, 한 번만 더 할매의 손을 잡아볼걸.

 

Image by rawpixe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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