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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세이/<저는 부모님을 요양병원에 모시려고 합니다>

08. 한의사로서의 삶, 간병인으로서의 삶

by BOOKCAST 2022. 1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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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아버님의 생신이었다. 평소 좋아하시는 초밥과 잡채, 미역국, 새우구이를 준비했다. 생일 케이크에 촛불을 켜고 아이와 함께 생신 축하 노래도 불렀다. 명절이나 생신 때마다 외동아들과 며느리만 축하하던 과거에는 잔칫상이 썰렁했는데 아기가 채워준 우리 집 공간은 참 크고 따뜻했다.

아버님은 센터에서 돌아오시면 저녁 시간 거실에서 아이와 놀이를 하신다. 아기가 갓난쟁이 때는 아버님이 주로 실내용 유모차를 밀어 주셨지만, 지금은 상호 작용이 가능할 만큼 자랐다. 아기는 할아버지가 방에서 나오시면 반가워서 “카! 카!”라고 외친다. 카드놀이를 하려는 것이다. 한 통에 50장의 카드가 들어있는데 한자리에 앉아 다 공부할 만큼 아이의 인내심이 늘었다. 아이는 할아버지와 카드놀이를 하면서 자신의 지식을 알려주는 것을 좋아한다. 할아버지에게 카드에 그려진 사물을 하나하나 가르쳐드린다. 할아버지는 아기와 카드를 번갈아 바라보며 빙그레 웃으신다.

아버님은 요즘 더욱 말수가 줄었다. 예전에는 센터에서 있었던 일이나 사람들에 대해 자주 말씀하셨는데 이제는 거의 말씀이 없으시다. 의사 표현이 필요한 상황에도 몇 개의 단어만 나열하실 뿐 제대로 된 문장으로 말씀하지 못하신다. 카드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표정이 점점 아리송해지자, 아기의 표정에도 점점 힘이 들어간다.

‘노인이 되면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간다’라는 말이 있다. 나는 자녀 육아와 부모 간병을 한 공간에서 동시에 수행하면서 인간의 성장과 노쇠에 대해 선명하게 지켜볼 수 있었다.

옹알이하다가 조금씩 언어를 습득하는 아이와 점점 말과 글을 상실하며 의사소통이 어려워지는 노인, 걸음마를 시작하며 아장아장 걷는 아이와 보행이 힘들어지면서 중심을 잃고 주저앉는 노인, 배변 훈련을 하다가 결국 변기 사용이 익숙해지는 아이와 대소변 실수를 반복하다가 결국 기저귀를 착용하는 노인. 아이의 발달 과정 역순으로 노인의 능력은 쇠퇴하였다.

요양병원에서 근무하며 노인의 삶과 변화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부모의 늙음과 병듦을 바라보는 심정은 좀 더 복잡하고 때로는 서글프다. 한의사에게 생로병사는 관찰과 치료, 연구의 대상이었지만, 간병하는 자식에게는 하루하루 극복해야 하는 슬픔이자 현실이었다.


간병의 어려움을 불평하며 허우적거리다가 문득 ‘이 순간 가장 힘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아버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까이에서 관찰하며 돌보던 한의사도, 부모의 간병을 책임지는 자식도 아닌 늙음과 병듦의 당사자, 아버님의 혼란스럽고 아픈 마음을 알아차리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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