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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세이/<저는 부모님을 요양병원에 모시려고 합니다>

09. 라뽀를 통한 노후 예습 (마지막 회)

by BOOKCAST 2022. 1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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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뽀(Rapport)는 ‘관계’라는 뜻의 프랑스어로, 의료인과 환자 사이의 관계와 신뢰 정도를 일컫습니다. 의료에 있어서 라뽀가 필수적인 이유는 의료진과 환자 간에 신뢰와 의사소통이 없다면 치료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라뽀를 형성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며, 요양병원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요양병원의 특성상 환자 대부분은 삶의 마지막 순간인 임종까지 의료진과 마주하게 됩니다. 외부의 병의원이라면 A 병원의 진료가 마음에 안 들 경우 B 병원으로 옮기면 그뿐이지만, 요양병원에서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저 역시 요양병원에서 처음 환자를 대할 때,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의 라뽀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열 번의 춘하추동을 동고동락하다 보니 노인 환자들의 삶을 통해 제 인생과 노후에 관한 생각을 끊임없이 하게 되었고, 진료에 임할 때는 측은지심보다는 역지사지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 저의 가장 큰 고민은 ‘수학’이었습니다. 그러나 학교를 졸업하면서 인생에는 수학보다 더 어려운 문제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수학은 학원에 다니며 예습이라도 할 수 있는데 인생은 예측 불가의 영역이라 예습도 할 수 없으며, 시험지에 잘못된 답을 써도 수정할 수 없다는 냉정한 현실이 두렵습니다. 그래도 젊고 건강하다면 인생의 시험 문제들을 풀어나 갈 힘이 있지만 늙고 병들었을 때 우리는 가장 어려운 시험지인 ‘노후’에 직면하게 됩니다.

라뽀를 통해 생로병사(生老病師)들께서 젊은 저에게 넌지시 건네준 노후 생활의 답안, 그 모습이 100% 정답은 아니더라도 인간의 생명과 늙음, 병듦과 죽음에 대한 화두를 끊임없이 던져주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생로병사(生老病師)와의 일상을 기록한 일기를 모아 가장 어려운 인생의 시험지, 노후를 대비하는 참고서로 활용하려고 합니다.

오늘도 저는 일터이자 배움터인 요양병원의 병실에서 인생의 선생님, 生老病師께 반갑게 인사드립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간밤에 편히 주무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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