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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인간 실격>

04. 이제는 내 정체를 완벽히 은폐할 수 있겠구나

by BOOKCAST 2022. 6.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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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수기

바닷가. 파도가 들이친다고 해도 될 정도로 바다와 가까운 물가에, 새카만 나무껍질의 커다란 산벚나무가 스무 그루 넘게 쭉 서 있습니다. 새 학년이 시작되면 산벚나무는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끈끈한 갈색 어린잎과 함께 그 화려한 꽃을 피우고, 얼마 후에 꽃잎이 눈처럼 날릴 때에는 수많은 꽃잎이 바다에 흩뿌려져서 수면을 아로새기며 떠돌다가, 파도에 실려 다시 바닷가로 밀려오지요. 그 벚꽃으로 뒤덮인 모래밭을 그대로 교정으로 사용하는 도호쿠의 어느 중학교에 저는 입시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았는데, 그럭저럭 별일 없이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 중학교의 교복 모자 배지에도, 교복 단추에도 벚꽃 그림이 피어 있었습니다. 그 학교 바로 근처에 저희 먼 친척분이 살고 계셔서, 아버지가 제게 그 바다와 벚꽃의 중학교를 골라주신 겁니다. 저는 그 집에 맡겨졌지요. 어차피 학교가 바로 옆이어서 저는 아침 조회 종소리를 들은 후에야 냅다 뛰어서 등교하는 상당히 게으른 중학생이었습니다. 하지만 변함없는 개그 실력 덕에 나날이 반 친구들에게 인기를 얻게 되었지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흔히 말하는 타향살이를 하게 된 건데요, 저는 타향이 제가 태어난 고향보다 훨씬 마음 편한 장소로 느껴졌습니다. 뭐, 그 무렵엔 저의 개그도 확실히 몸에 딱 익어서,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게 이전만큼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그것보다도 아무리 천재 연기자라 해도, 설령 신의 아들인 예수라도 가족과 타인, 고향과 타향, 그것들 사이에는 확실히 연기 난이도의 차이가 존재하지 않을까요? 배우에게 가장 연기하기 어려운 장소는 그야말로 고향이라는 극장일 겁니다. 게다가 모든 일가친척이 전부 모여 앉아 있는 방구석에서는 제아무리 명배우라 해도 연기하기 힘들지 않을까요? 하지만 저는 꿋꿋이 연기해왔습니다. 게다가 제 연기는 꽤 성공적이었지요. 그 정도로 보통이 아닌 놈이 타향에 나왔으니, 어지간해서는 연기를 실패할 리가 없을 겁니다.

인간에 대한 저의 공포는 예전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을 정도로 가슴속에서 격렬하게 꿈틀거리고 있었지만, 제 연기는 그야말로 쑥쑥 발전해서 저는 교실에서 늘 반 친구들을 웃겼고, 선생님도 말로는 “이 반은 오바 요조만 없으면 진짜 좋은 반인데”라고 투덜댔지만 손으로는 입을 가리고 웃으시더군요. 저는 천둥소리처럼 거칠고 사나운 소리를 질러대는 배속 장교조차, 정말 쉽게 웃음 터지게 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내 정체를 완벽히 은폐할 수 있겠구나 하고 안심하려던 참에 저는 그야말로 생각지도 못한 뒤통수를 맞았습니다. 예상치 못한 공격을 하는 자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그는 반에서 제일 빈약한 체구에 얼굴도 푸르뎅뎅한 아이였습니다. 아버지나 형이 입던 것처럼 낡고, 쇼토쿠 태자 옷처럼 소매가 기다란 상의를 입고 있었습니다. 잘하는 과목은 하나도 없고, 교련이나 체육 시간에는 늘 참여하지 않고 구경만 하는 백치 비슷한 학생이었습니다. 저도 미처 그 학생까지 경계할 필요는 못 느꼈던 겁니다.

그날, 체육 시간에 그 학생(지금 성은 기억나지 않지만, 이름은 다케이치였던 것 같습니다), 다케이치는 여느 때처럼 구경을 하고 우리는 철봉 연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일부러 최대한 엄숙한 얼굴을 하고 철봉 쪽으로 에잇 하고 소리 지르며 달려가, 그대로 멀리뛰기하듯이 앞으로 날아올라 모랫바닥에 쿵 하고 엉덩방아를 찧었습니다. 이 모든 게 계획적인 실패였습니다. 예상대로 다들 웃음이 터졌고 저도 쓴웃음을 지으며 일어나 바지의 모래를 털고 있는데, 언제 가까이 왔는지 다케이치가 제 등을 쿡 찌르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습니다.

“일부러 그랬네, 일부러.”


저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일부러 실수한 걸 다른 이도 아닌 하필 다케이치가 간파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으니까요. 세상이 한순간에 지옥의 맹렬한 불길에 둘러싸여 타오르는 것을 눈앞에서 보는 것만 같아서 악! 하고 소리 지르며 미쳐버릴 것 같은 마음을 필사적인 힘으로 억눌렀습니다.

그때부터 나날이 계속되는 저의 불안과 공포.

겉으로는 변함없이 서글픈 개그 연기를 해서 모두를 웃게 만들었지만, 문득 저도 모르게 무거운 한숨이 나왔습니다. 내가 뭘 한다 한들 다케이치에게 하나하나 간파당하겠지, 머지않아 다케이치가 누군가에게 그걸 말하고 다닐 게 틀림없어, 라고 생각하니 이마는 식은땀으로 축축해지고, 미친 사람처럼 묘한 눈빛으로 괜히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둘러보게 되더군요. 가능하다면 아침, 점심, 저녁 온종일 다케이치 옆에 있으면서 그가 비밀을 입 밖에 내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에게 달라붙어 있는 동안에 저의 개그는 ‘일부러’가 아니라 진짜였다는 생각이 들도록, 그야말로 온갖 노력을 기울여서 기회가 닿으면 다케이치와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버리고 싶다고, 만약 그 노력이 전부 다 실패한다면 이제는 그가 죽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고까지 골똘히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역시 그를 죽여야겠다는 마음만은 들지 않았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살면서 다른 사람 손에 죽고 싶다는 생각은 몇 번 해봤지만, 다른 사람을 죽이고 싶다고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무서운 상대방에게 오히려 행복을 줄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다케이치를 포섭하기 위해 일단 얼굴에 가짜 크리스천처럼 ‘상냥한’ 미소를 띠고, 고개를 30도 정도 왼쪽으로 기울여서, 그의 자그마한 어깨를 가볍게 감싸 안고는 부드럽고 달콤한 목소리로 제가 살고 있는 집에 놀러 오라고 여러 번 권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늘 멍한 눈빛을 할 뿐,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방과 후, 아마 초여름 무렵이었을 겁니다. 소나기가 희뿌옇게 내리는 바람에 아이들이 집에 가기 난감해하고 있었는데, 저는 집이 바로 옆이어서 아무렇지 않게 밖으로 뛰어나가다가 우연히 신발장 뒤에 풀이 죽은 채 서 있는 다케이치를 발견하고는 “같이 가자. 우산 빌려줄게” 하며 머뭇거리는 다케이치의 손을 끌어당겼습니다. 같이 빗속을 달려 집에 도착해서는 아주머니에게 우리의 겉옷을 말려달라고 부탁하고, 다케이치를 2층에 있는 제 방에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 집에는 쉰 살이 넘은 아주머니와 서른 살 정도 된 병약해 보이고 안경 쓴 키 큰 누나(한 번 시집을 갔다가, 다시 집에 돌아온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이 집 사람들을 따라서 이 누나를 아네사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여학교를 막 졸업한, 언니와 달리 키가 작고 얼굴이 둥근 셋짱(아네사의 여동생)이 살고 있었습니다. 3인 가족이고, 아래층의 가게에서는 문구용품과 운동기구를 진열해두고 팔기는 했으나 그 집의 주된 수입은 돌아가신 남편이 남기고 가신 공동주택 대여섯 동의 월세인 것 같았습니다.

“귀 아파.”

다케이치는 서 있는 채로 그렇게 말했습니다.

“비 맞았더니 귀가 아프네.”
제가 살펴보니 양쪽 귀가 많이 곪아 있었습니다. 고름이 막 귓바퀴 바깥쪽으로 흘러내릴 것 같았습니다.

“이거 큰일이다. 아프겠는데.”
라고 저는 오버하며 놀란 듯이 말했습니다.
“비 오는데 억지로 데리고 와서 미안해.”
라고 여자 같은 말투로 ‘상냥하게’ 사과하고, 아래층에 가서 솜과 알코올을 받아와서, 제 무릎을 베개 삼아 다케이치를 눕히고는 정성스레 귀를 닦아주었습니다. 다케이치도 이게 위선적인 못된 계획이라는 점은 눈치채지 못한 듯이,
“여자들이 너한테 홀딱 반하겠어”라고 제 무릎베개 위에 누워서 멍청한 아부를 하더군요.

하지만 이 말이, 아마 다케이치 본인도 의식하지 못했을 정도의 무시무시한 악마의 예언이었다는 사실을 저도 한참 후에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가 여자에게 반한다느니, 여자가 나에게 반한다느니 그런 말은 굉장히 상스럽고 경박하고 우쭐거리는 느낌이 듭니다. 아무리 ‘엄숙’한 자리라도, 그곳에서 이 말 한마디가 쑥 얼굴을 내밀면 순식간에 우울의 가람은 무너지고 그저 밋밋함만 남는다는 생각이 들 겁니다. ‘여자들이 자꾸 나한테 반해서 괴로워’라는 속된 말이 아니라, ‘사랑받는 불안함’이라는 문학적인 표현을 쓰면 우울의 가람이 무너지지는 않을 것 같으니 참 희한한 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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