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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혼자서 종이우산을 쓰고 가다>

03. 이미 우리 가족은 와해되고 말았다.

by BOOKCAST 2022. 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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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검정 레이스 속옷(이란 요컨대 브래지어와 쇼츠)만 걸친 모습으로 커다란 코끼리를 타고 앉아 뒤에 많은 늑대를 거느린 채 거리를 행진하면서 길가의 나를 내려다보며 우아하게 미소 짓는다. 그와 같은 기묘한 꿈을 꾸고 눈을 뜨자 곁에 아내의 모습은 없고 시트와 베개만 놓여 있었다. 창밖은 이미 해가 떠올라 밝다.

아내는 거실에 있었다. 제대로 옷을 갈아입고서(나로 말할 것 같으면 파자마에 플리스를 걸쳤을 뿐이다)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다.

“잘 잤어? 새해 복 많이 받아.”
지난밤, 날짜가 바뀐 순간에 TV(새해맞이 카운트다운은 TV도쿄를 보며 맞이하는 것으로 정해 놓았다. 화려한 악기 소리가 좋다)를 보면서 건배하고 새해 인사도 입에 올렸지만 더욱 확실히 다지기 위해 다시 한번 말했다.

“맥주 사 오래, 엄마가.”
인사를 깨끗이 생략하고 아내는 말했다. 그리고 마치 증거를 보일 필요가 있다는 듯이 날 향해 스마트폰을 들어 보인다.

“알았어. 그럼 사 가자.”
나는 대답했다.

샤워를 하고, 연하장을 읽고 나서 집을 나섰다. 먹고도 남을 만큼 많은 양의 점심 식사가 준비되어 있다는 걸 아는 터라 아침은 걸렀다. 맑고 조용한 주택가를 걷는다. 우리가 사는 맨션에서부터 아내의 친정까지는 걸어서 15분 거리다(맥주를 살 수 있는 편의점도 가는 길에 있다). 이 집 저 집 문 앞에 세워 둔 장식 소나무며 입구에 걸어 둔 귤 장식들을 바라보며 걸었다.

“오늘 아침, 이상한 꿈을 꿨는데 말이야.”
걸으면서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내가 생각해도 왜 그랬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아내가 속옷 차림이었던 것은 빼고 코끼리를 타고 있었던 거며 우아하게 미소 지었던 것, 나 자신은 길가에 서 있었던 것 등 기억나는 한 자세히 설명했다.

“직업병.”
재미있어할 줄 알았는데 아내의 반응은 그 한마디가 다였다. 내 직업은 아닌 게 아니라 수의사이다. 하지만 내가 근무하는 병원에 코끼리며 늑대를 들인 적은 물론 없다.

“하늘, 파랗네.”
꿈 이야기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아내는 위를 향해 중얼거린다. 다른 집 아내들도 그런지, 우리 집 리호만 그런 건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집 안에서 보는 리호와 밖에서 보는 리호는 인상이 다르다. 밖에서 더 사랑스러워 보인다. 그 점이 나는 늘 이상하다. 반대면 좋을 텐데, 라는 생각도 한다.

“우리 왔어요.”
현관에서 아내가 밝게 목소리를 높인다. 벽의 코트걸이에 눈길이 가고 손위 처남 내외가 이미 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요리 냄새가 안쪽에서 감돌아 나온다. 벌써부터 집에 돌아갈 때가 빨리 왔으면 하고 기다려지는 마음으로 나는 신을 벗었다. 처가 식구들에게 섞여 드는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모두 선량한 사람이다. 다만 가족이니 친족이니 하는 것이 나는 원래 어색하다. 동물들과 어울리는 편이 훨씬 좋다. 본가 식구들과도 사이가 워낙 소원해서 결혼식에조차 숙부 한 사람만 초대했다(그런 나를 결혼 전 아내는 장난삼아 ‘고아’라 불렀다). 딱히 부모님에게 의절 당했다거나 내 쪽에서 연을 끊었다는 건 아니다. 그러기 전에 이미 우리 가족은 와해되고 말았다.


새해 인사, 장인의 환영의 표시인 팔 두드리기(철썩철썩, “잘 지내는가?”), 벗은 외투를 받아 들려고 내미는 장모의 손, 맥주를 냉장고에 넣으러 가는 처남댁의 타이츠에 감싸인 가는 다리. 병원에 이끌려 오는 개나 고양이의 심정이 피부에 와닿는다. 익숙지 않은 장소에서 인간들에게 둘러싸인 채 이것저것 보살핌을 받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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