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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혼자서 종이우산을 쓰고 가다>

08. 이런 사건을 일으키지 않더라도 남은 생이 그리 길지는 않았을 터이다.

by BOOKCAST 2022. 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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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노다 도요로서는 믿기 어렵게도 아버지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아키타 집은 팔아 버리고, 장서는 대부분 도서관에 기증하고(나머지는 유학 중인 손녀에게 물려준다고 유서에 쓰여 있고, 그 책들은 배편으로 이미 발송을 마쳤다), 가재도구 외 개인 물품도 전부 처분되고(평소 그릇에 꽂혀 있었고, 구식 카메라를 즐겨 수집하기도 하고 상당수의 음반도 갖고 있었을 터인데 그것들을 아버지가 어디서 어떻게 처분했는지 도요로서는 짐작도 가지 않는다), 통장이며 보험 증서, 연금 수첩, 집 매매 계약서와 같은 중요 서류는 물론이고 배편으로 손녀에게 보낸 짐의 부본에 이르기까지 꼼꼼하게 정리해 가방에 넣어 두었다. 확실히 충동적인 자살은 아니고, 그만한 준비를 가족에게 일절 알리지 않고 전부 혼자서 진행해 왔다는 사실에 도요는 좌절한다.

도대체 왜 자살해야만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아버지는 여든여섯 살이고 암을 앓기도 했다. 이런 사건을 일으키지 않더라도 남은 생이 그리 길지는 않았을 터이다.

어제보다 사람 수가 늘어나서(미야시타 치사코 씨네는 딸에 더해 손녀가 나타나고, 시게모리 츠토무 씨네는 지인이라는 사람이 또 한 명 나타났다) 방 안이 갑갑하다. 도요 자신의 가족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네 사람(도요와 아내, 여동생인 미도리와 그 남편)이지만 내일이면 유학 중인 딸도 급히 귀국할 예정이다. 이런 장소에 남들과 함께 밀어 넣어져 있자니 영 거북해서 도요로서는 얼른 가족들끼리만 있고 싶었다. 장례 준비를 해야 하고 어제부터 내내 눈물 바람인 여동생을 어떻게든 안정시킬 필요도 있다.

 

 

경찰 측 설명에는 거의 진전이 없고(엽총이 아버지 소유였다는 것은 밝혀졌지만) 대기 시간만 길다. 게다가 정초이다 보니 유서며 시신을 검증 분석 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탓에 바로 인계받기는 어렵지 싶다.

“한꺼번에 이야기를 듣는 편이 낫지 않을까.”
대화가 가능한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도요는 그렇게 말해 보았다. 한 가족씩 방방이 불려 가는 지금의 방식으로는 시간이 너무 걸리는 데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유서만 해도 아버지가 작성한 건 보여 주었지만 다른 두 사람 것은 볼 수가 없고, 어쩌다 이 사달이 났는지 전체상이 전혀 잡히지 않는다.

“흐음, 글쎄요.”
시게모리의 지인이라는 남자의 대답은 미덥지 못하다.

“프라이버시라든지, 있지 않겠습니까, 아무래도.”
프라이버시고 뭐고, 하고 도요는 생각한다. 그들은 밀실에서 함께 죽었을 뿐 아니라 같은 매장 장소까지 준비해 두었다. 더구나 ‘뒤처리 및 제반 비용’ 명목으로 호텔 방에 남겨져 있던 적지 않은 액수의 현금은 세 사람 몫을 합친 것이지 싶다. 애당초 프라이버시고 뭐고 없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뭐, 미야시타 씨네 유족 두 분이 돌아오시면, 다 있는 자리에서 경찰 측의 설명이 또 있지 않겠습니까.”
시게모리의 지인이라는 또 다른 남자가 말했다. 지인들은 두 사람 다 마치 장의사 같은 검은 양복을 입고 있다. 고인에 대한 경의이겠거니 여기면서도 도요는 너무 앞서간다는 기분이 들었다. 아직 빈소도 차리지 못했다. 유족들이 모여 있는 이 방은 흔해 빠진 기업 응접실 같은 구조로 벽에는 어두운 색조의 유화와 달력이 걸려 있다. 중앙 테이블에 물이 든 페트병이 여러 개 놓여 있지만 아무도 손을 대지 않고, 창문에 달린 블라인드 너머로 바깥 풍경이 줄무늬로 보인다.

또다시 오열을 참아낼 수 없게 된 듯 미도리가 힘없이 조용히 방을 나간다(아내가 걱정스러운 듯 뒤따라 나갔다). 도요가 이해하기 어려운 건 설령 자살을 한다 쳐도 그 냉정한 아버지가 왜 이토록 선정적이고 세상 시끄러운 방법을 선택했을까 하는 점이다. 어쩌면 다른 두 사람(아니면 둘 중 누구 하나)의 꼬드김에 넘어가 이 무모한 계획에 거지반 억지로 끌려 들어간 건 아닌지 의심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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