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미 충분히 살았습니다.
유서 속의 그 한 문장이 도우코의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게다가 그 글씨─. 유서는 블루블랙 만년필로 쓰여 있었다. 도우코가 어릴 적부터 받아 온 많은 편지도 그러했다. 굵직굵직하면서도 특유의 둥그스름한 느낌이 나는 부드러운 그 글씨. 두 번 확인할 것도 없이 도우코가 아는 치사코 씨 그 자체여서 치사코의 인품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데다 거의 체온과 육성까지 동반하여 도우코를 동요하게 만들었다.
고인과 마지막으로 만난 때가 언제이며 전화 통화 외에 마지막으로 이야기 나눈 게 언제인지, 어떤 내용의 이야기였는지, 최근 들어 달라진 점은 없었는지, 고인과는 친했는지, 다른 두 사람에 대해 뭔가 들은 이야기가 있는지─. 이런 경우, 경찰에는 질문의 수순이란 것이 있을 테니 어쩔 수 없다 쳐도 그 질문 하나하나가 도우코에게는 무례하게 느껴진다. 마치 노인을 어이없이 죽게 했다고 질책당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라고 도우코는 생각한다. 치사코 씨에 관해서든 우리에 관해서든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질문은 끝이 나질 않는다. 옆에서 어머니가 간단히 대답하고 있다. 네, 만난 적은 없습니다. 아뇨, 알지 못합니다. 네, 아마 그렇지 싶습니다. 몇 년 만에 만난 어머니는 여전히 조용하니 눈에 띄지 않고, 상황을 고려하면 당연한 일이지만 긴장한 모습으로 파랗게 질려 있다. 하지만 다른 유족들처럼 우는 일은 없이 어떻게든 버티고 있었다. 꿋꿋한 사람이라고 도우코는 생각한다. 꿋꿋함에 관해선 나름대로 자신 있는 도우코 자신조차 유서를 봤을 때에는 울지 않을 수 없었는데.
게다가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유품들. 치사코 씨는 자그마한 여행 가방을 호텔 방에 가지고 들어갔고, 아마도 도저히 손에서 놓을 수 없었을 그 물건들 ─ 오랫동안 살았던 맨션을 포함하여 치사코 씨는 그 물건들을 제외한 모든 것을 이미 처분한 듯 보였기에 ─ 에 관해서도 경찰은 이것저것 묻고(본 기억이 있는지의 유무, 내력, 고인에게 왜 중요했었다고 보는지 등등), ‘모른다’라는 대답만 계속해야 했던 어머니의 심중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어머니와 치사코 씨는 결코 사이좋은 모녀지간은 아니었다.
도우코는 맞서는 듯한 심정으로 유품을 바라본다.
• 엄청난 수의 편지(약 절반은 훗날의 남편이자 도우코의 할아버지이기도 한 쥰야로부터 온 것이지만 나머지 절반은 이름을 봐도 도우코로서는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남자와 여자로부터 온 것이다)
• 콤팩트디스크 다섯 장(옛날 사진이 담겨 있는 모양이다. 인화한 사진을 디스크로 옮기는 작업은 손수 할 수 없었을 터이니 아마도 업자에게 부탁했을 테지)
• 개 목걸이 일곱 개(치사코 씨는 애견인이었다)
• 남성용 손목시계(이건 쥰야 것이라고 어머니가 특정했다)
• 칠보 브로치(내력 불명)
• 정교한 철사 세공 강아지(내력 불명)
• 손바닥에 올려놓을 만한 크기의 치와와 봉제 인형(내력 불명)
• 나무 상자에 담긴 탯줄(치사코 씨가 낳은 아기는 한 명뿐이라서 아마도 어머니의 탯줄)
• 빨간 담배 케이스(예전 동료들한테서 환갑 축하 선물로 받은 것임을 도우코는 알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 가방에는 도우코가 쓴 첫 소설(헌사와 사인이 들어간)도 채워져 있었다.
너무나도 개인적이고 두서없는 물건들을 앞에 두고 도우코는 어찌할 바를 모른다. 이것들은 다름 아닌 치사코 씨 옆에 있어야 마땅하다. 살풍경한 경찰서 골방 책상 위 같은 곳에 줄줄이 늘어서 있어서 좋을 리 없다. 당장이라도 몽땅 그러모아 남들 눈이 닿지 않는 장소에 숨겨 두고 싶다는 충동을 도우코는 간신히 억누른다.
이미 충분히 살았습니다.
그 한 문장이 치사코 씨의 목소리를 동반하고 다시 되살아난다. 치사코 씨는 여든두 살이었다. 그 말마따나 이미 충분히 살았는지도 모르지만, 그런 이유로 사람은 엽총 자살 따위를 하진 않을 거라고 도우코는 생각한다. 경찰 이야기로는 사망한 다른 두 노인 중 한 사람은 암을 앓았고, 나머지 한 사람에게는 일가친척이 없고 경제적으로도 곤궁한 데다 빚도 있었던 듯하다. 양쪽 다 자살의 이유가 될 수 있겠지만 치사코 씨는? 할머니의 자살 동기가 무엇인지, 유서를 읽어도 도우코는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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