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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혼자서 종이우산을 쓰고 가다>

06. 그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뼛속 깊이 스며드는 맛과 차가움.

by BOOKCAST 2022. 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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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 경찰서에는 쥰이치 외에 시노다 간지의 유족과 미야시타 치사코의 유족이 와 있었다(사정 정취는 따로따로 받았지만, 첫 설명은 한방에 모여 다 같이 들었다). 유족도 아닌 쥰이치가 불려 간 까닭은 그렇게 하도록 유서와 함께 쥰이치의 연락처가 남겨져 있었기 때문이며 경찰의 설명에 따르면 츠토무에게는 일가친척이 없는 듯하다. 확실히 줄곧 독신을 유지해 왔고 외동이라서 형제자매도 없고 양친은 이미 타계했다. 하지만 단 한 명의 친척도 없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인지 쥰이치는 알 수 없었다. 사촌이든 육촌이든, 그 자녀든 손주든 누군가는 있지 않을까. 아니면 츠토무 자신의 숨겨 둔 자식이라든지? 쥰이치가 아는 것만 해도 츠토무에게는 여자가 몇 명인가 있었다. 여자뿐만이 아니다. 츠토무에게는 친구도 아주 많았으련만 문제는 어디까지(그리고 어떻게) 연락해야 하느냐였다. 알려야 할 상대는 당장 이 사람 저 사람 떠오르지만, 자살이라는 것은 조심스럽게 말해도 충격적인 사태이고, 따라서 아마도 아주 작은 소리로 전해야 할 필요가 있으리라.

쥰이치는 사망한 시노다 간지며 미야시타 치사코와도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1970년대에 츠토무가 시작하여 80년대에 쥰이치가 입사한 수입 회사의 경기가 매우 좋았던 무렵이다. 만난 곳은 대개 술자리 아니면 그들이 말하는 ‘공부 모임’ 자리였다.

엄청 쌩쌩한 노인들이라고 여겼지만 당시의 그들은 지금의 쥰이치보다 젊었다. 잘 마시고 잘 먹고 잘 웃고, 무엇보다 잘 떠드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열띤 논쟁을 지켜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어서 쥰이치는 끼워 주면 언제든 따라나섰다. 세 사람의 우정이랄까 애정이랄까 친밀감은 옆에서 봐도 보통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함께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이 그 친밀감을 웅변해 주고 있다. 그래서 쥰이치는 낮에 만난 시노다 간지의 유족과 미야시타 치사코의 유족이 첫 대면이라는 소리를 듣고 의외다 싶었다. 그토록 친한 사이라면 서로의 가족들과도 무언가 교류가 있으려니 여겼는데 그렇지도 않았던 모양이다.

“가와이 씨.”

이름이 불리기에 가만 보니 눈앞에 샴페인 잔이 놓여 있었다.

“일단 설날이니까 다 같이 한잔 하자고, 저쪽에서.”

저쪽이란 구석의 테이블석으로, 같은 잔을 손에 든 30대 가량의 사람들이 어느 틈엔가 한껏 흥이 올라 있다. 됐어요 나는, 이라고 말하려다 만 까닭은 츠토무의 목소리가 들린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촌스럽구만, 자네는.
그 사람들이라면 그렇게 말했겠지.
주는 술은 마시라고.
그런 말도 했을지 모른다. 쥰이치는 잔을 들어 샴페인에 입을 댄다. 시게모리 츠토무가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비로소 뼛속 깊이 스며드는 맛과 차가움이었다.


경찰서에는 내일도 가기로 되어 있다. 호텔에 대한 손해 배상이라든지 유언장 검인이라든지 이것저것 고약한 일이 남아 있는 모양이다. 혈연도 아닌데 지명받은 쥰이치를 경찰과 병원 관계자들은 모두 동정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쥰이치 자신은 지명을 받았다는 사실이 오히려 기뻤다. 상황을 고려하면 분명 어울리는 말은 아니었지만 츠토무에게 신뢰받았다는 것이 기쁘고, 그런 이상 모든 일을 깔끔하게 해내고 싶었다. 신세를 졌기 때문이라기보다 그가 좋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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