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하기 전에, 퇴사는 나를 한참이나 깎아내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저만치 아래로 내려가 버린, 그래서 더 이상 서로의 눈높이를 맞출 수 없는 나는, 더 이상 아내 앞에서 예전처럼 당당히 설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설령 용기를 내어 피하지 않고 고개를 들어 마주 선다고 하더라도, 그 모습이 뻔뻔함으로 보이지는 않을까 두려웠다. 아내는 그런 걱정이 나 혼자 불어 제껴 부풀어버린 풍선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깟 일 때문에 당신이 달라지는 건 없어.”
퇴사 시기를 잡기 전 돌아봐야 할 것이 많았다. 결혼을 하면서 새로운 가족이 늘었고, 가족은 내 선택과 결정을 일일이 설득하지 않아도 되는 친구나 지인들과는 달랐다.
“너희 부모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나의 퇴사를 망설임 없이 동의해 주던 아내가 주춤했다. 사랑으로 곱게 키운 막내딸이었다. 장모님은 늘 막내딸이 어려움 없이 행복하기를 기도하셨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백수가 되어, 소중한 딸의 행복에 행여나 금이 가게 할지도 모르는 사위를 선뜻 이해해 주실 거 같지 않았다.
“당신 부모님은?”
그건 걱정이 없었다.
“내가 이겨.”
‘다른 밥벌이를 준비해 놓고 퇴사한다’로 생각했던 일이, 그깟 일이라고 말해 주는 아내 덕분에 ‘퇴사를 하고 난 후 다른 일을 찾아본다’로 한 걸음 물러설 수 있었다. 퇴사 후 다른 일을 찾을 때 까지는 내가 가정주부의 역할을 맡기로 했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확실한 내조를 약속했다. 가장은 빈틈없는 내조를 받으면서 바깥 일만 신경 쓰면 된다고 했다. 그즈음부터 아내를 이따금 ‘바깥양반’이라고 불렀다. 난 ‘안사람’이라는 말이 좋았다.
일단은 거기까지였다. 부모님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퇴사 이후 할 ‘다른 일’을 보여 드려야 했다. 지금보다 더 근사한 직업이면 좋겠지만, 그리될 리는 없다. 주말에 산책하면서 나누는 대화는 언제나 퇴사 이후의 얘기였다.
“학원 강사를 해 보면 어떨까. 나 대학교 때 아르바이트로 학원 강사도 했었는데, 인기 좋았거든.”
“9급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해 볼까? 요즘은 나이 제한이 없대.”
아내도 가끔 거들었다.
“난 도서관 사서를 하고 싶었는데. 나 전공도 문헌정보학과잖아.”
시간이 지날수록 어릴 적 꿈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해 질 무렵인 저녁에 불을 켜고, 동트는 새벽에 불을 끄는 게 해야 할 일의 전부일 것 같았던 등대지기는 나의 꿈이었다. 하루에 한두 시간만 일하는 것처럼 보였던 라디오 DJ도 있었고, 어디서 본 것 같기는 한데 이름은 모를 정도의 인지도만 가진 (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싶지 않았다) 중년 배우도 내 오랜 꿈 중의 하나였다. 아내의 꿈은 나보다 현실성이 있었다. 어릴 적 글쓰기가 재밌었고, 나름 잘 쓴다고 들어서 막연하게 작가가 되고 싶었다고 했다.
“역사 공부는 오래된 영화를 보는 거 같아서 좋아.”
역사학자도 아내의 꿈이었다.
맘속에 품고 있었던 꿈 이야기를 할 때, 아내의 표정이 항상 밝았다는 걸 눈치챘어야 했다. 그럴 때면 꿈 이야기를 멈춘 채, 은근슬쩍 다른 주제로 넘어갔어야 했다. 아내의 마음 한쪽에서 뜨거운 불길이 치솟고 있다는 걸 나는 전혀 몰랐다.
“나도 때려칠까?”
아내의 표정은 환했다.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게 이렇게나 해맑을 일인지. 나를 먹여 살리겠다고 큰소리쳐서 날 감동시키더니, 이제 와서, 심지어 난 아직 퇴사도 안 했는데 본인도 때려치우겠다는 뜻을 보였다.
“나도 요즘 들어 예전처럼 이 일이 재밌지가 않아.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고 싶다.”
의기소침해 있는 나를 응원하기 위해 퇴사를 ‘그깟 일’ 취급한 줄 알았는데, 실제로 아내에게 퇴사 정도의 일은 ‘그깟 일’이었다. 연애 시절, 마흔 살에 은퇴하는 게 꿈이었다고 아내에게 가끔 얘기했었다. 그건 등대지기만큼이나 현실성이 없는, 단지 꿈일 뿐이었다.
“당신이 못 이룬 꿈을 내가 대신 이뤄 줄게.”
이렇게 나올 줄 몰랐다. 왜 내 꿈을 네가 이루려는 건데. 내가 그만둔다고 하면서 아내만 일하라고 억지를 부릴 수도 없었다. 마침 아내의 나이가 올해 마흔이다. 큰일이다. 성실하던 아내가 나에게 물들었다. 부부가 결혼하자마자 둘 다 백수가 되려 한다. 양쪽 부모님들에게 이걸 설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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