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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세이/<조금 이른 은퇴를 했습니다>

02. 아내와 함께하기 위해서는

by BOOKCAST 2022.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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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만나기 이전에 했던 연애는 과정도 결과도 그리 좋지 않았다. 난 상대방이 힘들 때 기대어 쉴 수 있는 넓은 어깨를 가져야 했다. 남들은 무심코 지나치는 장점을 볼 수 있는 눈과 무엇이든 공감하면서 들어줄 수 있는 귀, 듣기 좋은 달콤한 말을 해 주는 입을 가져야 했다. 이상적인 연인 사이가 되기 위해서는 내 능력을 뛰어넘는 너무나도 많은 것들을 갖추어야 했다. 상대방이 나에게 그런 능력을 요구한 것도 아닌데, 그냥 스스로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언제나 둘의 관계에서 든든한 울타리이고 싶었다.
 
이런 생각이 빚어낸 배려심과 이타심이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기엔 내 그릇이 너무 작았다. 대가를 바라는 행동은 채권자의 마음이 되어 언젠가 나에게 갚아 주기를 바랐다. 외상 장부에 일일이 기록하고, 매일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둘 사이의 관계가 어긋나기 시작하는 건, 대가를 바라고 하는 행동들이 점차 쌓여 원금은커녕 이자도 못 받고 있다는 피해 의식이 들 때부터였다. 그렇게 삐걱대기 시작한 연애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번엔 늘 해 왔던 연애와는 달랐다. 아내는 대가를 바라는 행동을 할 때마다 바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어쩌면 나를 위한 것이었을지도 모를 일방적인 배려도 아내는 고마워했다. 별것 아닌 작은 친절에도 감동하고 좋아했다. 외상 장부에는 한 줄도 적을 게 없었다. 오히려 어떨 땐 내가 빚을 진 것 같았고, 내가 받은 만큼도 돌려주지 못하는 것에 미안함을 느꼈다. 이런저런 핑계로 빚을 갚는데 게을러도 아내는 독촉하지 않았다. 내 것과 아닌 것의 경계가 희미해져 갔다. 경계를 따지는 게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애초에 나 혼자 멋대로 그어놓은 선일 뿐이었다. 아내의 선은 둘을 감싸면서 바깥에 있었다.
 
당시에 하루에도 몇 번씩 퇴사를 생각하면서 물러진 정신은 작은 공격에도 쉽게 무너졌다. 한 번은, 지금은 잘 기억도 나지 않는 회사 동료의 서운한 말이 준 상처를 견뎌내기가 너무 힘들었던 적이 있었다.
 
나 조금만 기댈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볼 법도 했는데, 아내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단지 어깨를 내어주고 가볍게 등을 토닥거리기만 했다.  10분 남짓의 시간은 너무나 고요하고 평안했다.
 
아내와 내가 살아가는 곳은 시간이 각자 흐르는 다른 세상이었다. 당장이라도 퇴사를 할지, 아니면 최대한 버틸지, 퇴사를 한다면 언제 할지, 무엇으로 밥벌이를 할지, 주변은 나를 어떻게 바라볼지, 혹여 패배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을지, 부모님은 어떻게 설득할지, 어떤 계획을 보여드려야 나를 믿으실지. 나의 세상은 이런 고민으로 가득 차 있었다. 고민의 실타래가 뒤엉켜 꼬이면 아내의 세상으로 도망쳤다. 아내와 함께 있으면 엉킨 실타래 따위는 금방 잊혔다.
 
아내가 살고 있는 세상으로 간다는 건 나에겐 여행 같은 것이었다. 아내와 같이 있는 순간만큼은 나를 둘러싼 고민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그곳에서는 무엇을 먹으면 맛있을지, 무얼 하며 놀면 재밌을지 정도의 고민만 하면 충분했다. 그런 고민들은 엉키거나 꼬일 만큼 복잡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행은 결국 내가 사는 곳으로 돌아와야 했다. 엉킨 실타래는 단지 잊고 있었을 뿐이지 없어진 건 아니었고, 스스로 풀어져 있지도 않았다. 어차피 하나하나 내가 풀어야 했다.
 
직접적인 원인을 제거하지 않은 채 외면하고 도망 다니는 건 한계가 있었다. 회사에 있을 때는 회사를 그만두고 싶었고, 아내를 만날 때는 조금 더 버티고 싶었다. 나의 세상은 포기에 있었고, 아내의 세상은 버팀에 있었다. 둘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고, 그럴 성질의 것도 아니었다. 포기와 버팀 사이에서 방황하기 시작했다.
 
연애는 서로를 공유해야 했다. 연애는 내 민낯을 남에게 보이기 싫어서 쌓았던 성벽의 잠긴 문을 이따금 두드렸다. 다른 사람들을, 심지어 부모님까지도 성안에 들여놓지 않는 건 수월했는데 아내를 방어하는 건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당신의 머릿속에는 뭐가 있어?”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나 가보고 싶은 여행지를 묻는 것과는 달랐다. 이런 질문들의 답은 성 밖에 있었지만, 내 머릿속을 보여주려면 굳게 닫아놓았던 성안으로 아내를 들여야 했다.
 
아내에게 퇴사 고민을 선뜻 말하기는 어려웠다. 퇴사 이후 내 계획에는 아내의 자리가 없었다. 번듯한 직장인이라는 배경 없이 아내에게 당당할 자신이 없었다. 아내와 함께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버텨내야 했다. 버텨내지 못하고 포기한다는 건 회사뿐만 아니라 아내 역시 떠나보낸다는 걸 의미했다. 아내는 이따금 결혼 이후의 모습에 대해 얘기했지만, 난 그럴 때마다 은근슬쩍 말을 돌렸다. 아내는 둘의 미래를 바라보려 했지만, 난 현재만을 이야기했다.
이전에는 없었던 갈등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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