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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세이/<조금 이른 은퇴를 했습니다>

01. 나의 꿈은 가정주부가 되는 거야

by BOOKCAST 2022. 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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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내가 먼저 어차피 잡힐 손을
아내에게 내어준다.
 
마지막 출근을 했다. 연차가 남아있어서 실제 퇴직일은 아직 며칠이 남았지만 출근은 이걸로 끝이다. 20년 가까이 일을 했고, 그 기간 동안 여러 회사를 옮겨 다니다가 마지막으로 정착한 이 회사에서 12년 넘게 있었다.
 
퇴사를 처리하는 담당자와 마지막 면담을 했다. 담당자는 별로 궁금할 것도 없는 질문 몇 가지를 했다. 형식적이긴 하지만 회사에 아쉬웠던 점을 말해 달라기에 희망퇴직 제도가 없는 게 가장 아쉬웠다고 얘기했다. 면담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팀별, 파트별, 프로젝트별로 나뉜 단톡방에 마지막 퇴사 인사를 했다. 아쉬워하는 사람들의 인사말을 뒤로하고 단톡방을 나왔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울어 대던 장애 알림톡방도 탈출했다. 쓰던 장비와 사원증을 사내 데스크에 반납하고, 얼마 안 되는 남은 짐을 쇼핑백에 챙겼다. 회사 밖으로 나올 때까지도 퇴사를 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무료 주차권을 안 받았다는 걸 알고선 다시 회사로 돌아가면서 사원증은 이미 반납했는데 출입문은 어떻게 열지 하고 걱정했는데, 다행히 출입문이 열려 있었다. 주차권은 2시간까지만 무료였고, 이미 2시간을 넘겨서 추가로 2,500원을 내야 했다.
 
아직 퇴근 시간도 안 되었는데 집으로 가는 길에 차들이 많았다. ‘이 시간에 운전하는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하는 사람들일까 했지만, 딱히 궁금한 건 아니었다. 라디오가 틀어져 있었고, 나른한 오후를 깨우려는 진행자가 한층 목소리의 흥을 높였지만 내용이 잘 들리지는 않았다. ‘마지막 퇴근길인데.’ 하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실감이 나지는 않았다.
 
핸드폰에 부재중 알림이 있어서 보니 엄마였다. 며칠 전에 마지막 출근일을 말씀드렸었다. 그걸 기억하시고 전화를 하셨나 했는데, 무릎 안마기가 전원을 켜도 작동을 안 한다고 하신다. 충전한 배터리가 다 된 건가. 전기 값 별로 안 나오니 쓰지 않을 때는 꼭 충전기에 꽂아두라 말씀드리고 끊었다. 회사에서 짐 싸고 나와서 집에 가는 중이라는 얘기는 굳이 하지 않았다.
 
퇴근을 하고 왔는데도 아직 창밖이 밝았다. 좀 낯설긴 했지만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아내에게 연락해 오늘도 야근이냐고 물었다. 요즘 아내는 일이 많아서 매일 밤 11시가 다 되어서야 간신히 집에 왔는데, 축배를 들어야 하는 날이니 오늘은 일찍 퇴근하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저녁을 먹기에는 좀 일렀지만, 라면을 끓였다. 냉동실에 얼려두었던 밥도 전자레인지에 해동해 남은 국물에 말아서 해치웠다. 마침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오늘 제법 큰 수술을 치른다고 했었는데 무사히 잘 마쳤다고 한다. 목소리가 밝게 들려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마지막 출근을 마치고 집에 있다고 했더니 부러운 녀석이란다. 어느 정도 회복되어 면회가 가능해지면 병문안을 가겠다고 말했다. 퇴직금 받은 거로 고기를 사 달라는데, 수술만 아니었어도 백수인 내가 왜. 돈 버는 네가 사 했겠지만 그냥 그러겠다고 했다.
 
통화를 마친 핸드폰을 그냥 내려놓지 않고 습관처럼 카톡 메시지를 확인했다. 각종 업무용 단톡방 중에서 급하게 처리할 내용이 오가는 단톡방 알람은 살려두었었고, 미뤄 두었다가 처리해도 되는 단톡방 알람은 잠재웠었다. 핸드폰을 열 때마다 알람이 울리지 않은 채 쌓인 메시지가 보였었다. 수시로 핸드폰을 열어 쌓여 있는 카톡 메시지를 확인하는 게 습관이 됐었다. 집에 와서도 몇 번이나 핸드폰을 열었는데 읽지 않은 채로 쌓인 메시지가 없었다. 잠잠한 핸드폰이 어색했다.
 
마지막 출근일 이후로 목요일과 금요일은 부처님 오신 날, 근로자의 날이었다. 이어지는 주말까지 4일의 연휴 동안 아내와 함께 보냈다. 하루는 처가 식구들과 저녁 식사를 했고, 하루는 아내와 집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져 있는 산을 찾았다. 주말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퇴사 후 출근을 하지 않는 첫 번째 날인 오늘은, 아내가 건강 검진이 있어서 휴가를 냈다.
 
아직 퇴사 기분이 안 나. 그냥 긴 주말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아.”라고 했더니 아내가 평소 주말과 다른 점을 찾아냈다.
카톡이 조용하잖아.”
 
아내가 출근 준비를 하는 동안 나는 아침밥을 차려주겠다고 했다. 간단한 토스트나 샐러드가 아닌, 매일 바뀌는 따뜻한 국과 반찬에 갓 지은 밥으로 준비하겠다고 했다. 돈 버는 가장을 위해서 매일 정성껏 준비한 아침밥을 내어주겠다고 했는데 아내는 그리 기대하는 눈치가 아니다. 출근하기에 바쁜 아내가 그 귀한 아침 시간을 나에게 내어주지 않을 수도 있다. 어차피 직장 생활 내내 둘다 아침밥을 먹은 적이 없긴 하다.
 
집에서 혼자 보낼 날이 그리 길지는 않다. 아내는 두 달 후 회사에 퇴사 통보를 하겠다고 했다. 계획대로 진행이 된다면 가정주부로 보낼 시간이 두어 달 정도 된다. 회사에 퇴사를 하겠다고 말한 이후로 퇴사 과정은, 섭섭할 정도로 빠르고 순조롭게 진행이 되었다. 나와는 다르게 아내는 회사에서 능력을 인정받고 있어서 쉽게 놓아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가정주부의 시간은 조금 더 길어질 수도 있다.
 
나의 꿈은 가정주부가 되는 거야.”
연애할 때 농담처럼 얘기하곤 했다.
나는 일하는 게 버거운데 넌 재밌어하잖아. 그러니까 네가 가장이 되고 난 내조를 하는 거지.”
 
아내는 이런 대화를 재밌어했다. 어릴 때 하던 역할 바꾸기 놀이처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살아오면서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들은 많았다. 회사는 싫더라도 다녀야 하는 곳이었다. 꿈이 가정주부라고 말했던 건, 하기 싫은 걸 더 이상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의미였다.
 
마지막 출근일은 수요일이었고, 꿈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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