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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세이/<아빠의 비밀일기>

04. 보이후드

by BOOKCAST 2022. 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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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보이후드>는 <비포 선라이즈>로 익숙한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작품이다.
 
2015년 1월 신촌의 작은 극장을 홀로 찾아 처음 이 영화를 보았다. 오전 첫 회차인 조조 상영이라 관객은 두엇뿐이었다. 바깥이나 극장 안이나, 날씨도 분위기도 을씨년스럽기가 하나같았다. 그러나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 세상은 두 시간 전에 비해 훨씬 푸근했다. 마음 한편에 보드랍고 말랑한 감정들이 몽글몽글 덩이지는 걸 느꼈다. 독특하고 새로웠다.
 
새해 벽두였지만 조급하게도 나는 확신하고 있었다. 올해 최고의 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먼 훗날 인생영화를 꼽더라도 가뿐하게 베스트10 안에 들지 않을까! 한두 달 동안은 만나는 사람들 모두에게 이 영화를 꼭 봐야 한다며 영업을 하고 다녔다.
 
<보이후드>는 평단으로부터 받아 낸 융단 호평으로도 유명하다. 한 영화평론가는 이렇게 말했다.
“시간은 축적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연의 실험. 아이디어로 시작해 정성과 끈기로 완성한 영화. 한 아이의 성장에 가족과 미국의 역사가 모두 담긴 우주 같은 영화.”
 
영화가 만들어지기까지는 무려 12년이 걸렸다. 감독은 출연진과 함께 12년간 해마다 잠깐씩 모여 한 소년의 성장을 기록했다. 실제 촬영일수는 45일. 주변에 영화를 추천하면서 ‘반다반드(반 다큐멘터리 반 드라마)’라 표현한 이유다. 감독은 아빠 역할을 맡은 배우 에단 호크에게 자신이 죽으면 대신 영화를 완성해 달라 부탁을 해두었다고 한다. 이 경이롭고 뚱딴지같은 초유의 실험을 중단 없이 실행한 예술가들에게 나는 다시 한 번 존경의 기립박수를 보낸다.
 
바라만 봐도 미소가 나오는 천진한 여섯 살의 메이슨. 봉긋 부푼 볼에 솜털 풋풋한 이 소년은 바로 눈앞의 스크린 속에서 12년을 보내며 수염이 거뭇한 청년으로 변신한다. 그 사이 소년의 삶에는 많은 일이 일어난다. 준비 없이 이른 나이에 결혼한 부모는 이혼을 했고, 그 뒤로 메이슨 남매가 차례로 만나게 되는 새 아빠들은 무난한 가정을 꾸릴 만한 부류가 못 되었다.
 
주기적으로 교류하던 친아빠는 다행히 자신과 잘 맞는 여자와 재혼을 하여 자식을 낳고 살았다. 친아빠의 새 가족들이 열여섯 번째 생일을 맞은 메이슨을 집에 초대한다. 이 자리에서 메이슨은 아빠의 새로운 장인을 만나게 되는데, 처음 본 이 할아버지로부터 뜻밖의 생일선물을 받게 된다.
그는 선물을 건네기 전에 다정하고 고상한 말씨로 먼저 묻는다.
“메이슨, 이건 언젠가 내게 손자가 생기면 꼭 물려주고 싶었던 거란다. 네가 받아 주겠니?”
 
할아버지는 아이가 불편해하지 않도록 존중과 정성을 아끼지 않는다. 어른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품위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이임에도 친손자나 다름없다며 평생 간직해 온 유물을 남기는 것이다. 오늘 처음 만났고, 언제 다시 보게 될지 모르는 낯선 손자와 할아버지는 총을 다루는 방법을 알려주고 배우며 화목한 가족의 시간을 보낸다. 우리에겐 낯선 모습이지만 한 가족인 그들은 풍요롭고 행복하다. 가족관이 열려 있는 만큼 그들이 그릴 수 있는 사랑의 크기 또한 훨씬 더 넉넉해 보인다.
 
어느새 고교 졸업반이 된 메이슨에게서 더는 옛날의 소년을 찾아볼 수 없다. 웃음기 없이 멀뚱한 이 청년이 불과 두 시간 전의 그 아이가 맞나, 관객은 고개를 젓고 싶다.
 
사랑과 이별이 계절처럼 스쳐 간다. 어른들의 미숙함과, 아이가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가학적인 세상의 요구들이 거센 폭풍우처럼 몇 번이고 할퀴고 지나간다. 돌발적으로 바뀌는 환경과 관계들이 어서 변화에 적응하라고 다그친다. 관객이 하릴없이 묵인하며 엿보는 가운데 메이슨은 그의 보이후드로부터 멀어진다. 만약 우리가 본 게 저 아이 본인이 아니라, 성인 역에 캐스팅된 배우의 연기였다면 마음이 조금 나았을까.
 
찬란하고 맑았던 얼굴은 꿈처럼 사라지고 없다. 아이의 상실에 대하여 어른은 어떠한 이유로도 떳떳할 수 없다는 걸 영화는 차갑게 증명하고 있었다.
 
 
너와 나의 보이후드
 
문득 돌아다보니 나의 아이들도 눈 깜짝할 사이에 커 있다. 십 년 전 일곱 살짜리 미카엘의 사진과 지금을 비교해 보면 단지 몸집만 커진 것이 아니라 그 낯빛이 확 다르다. 아들의 얼굴에서 일곱 살의 표정을 내쫓은 주범이 내가 아니라고 발뺌할 수 없을 것 같다.
 
만약 이 순간에도 나도 모르게 저지르는 잘못이 있을지 모르겠다. 있다면, 진정 이제 그만 그것을 멈추고 싶다. 나와 아이들의 얼굴에 시나브로 자리 잡은 그늘 앞에서, 서먹해진 관계 앞에서, 남과 비교하느라 아이 그대로를 바라보지 못한 우둔함 앞에서 이제 그만이라고 말하고 싶다. 초심으로 돌아가 아이들과 같이 꿈꾸며 성장하는 아빠가 되고 싶다. 너희와 나의 아름다운 보이후드를 떠올리면서.
 
새벽 세 시다. 잠시 한숨 자고 일어나 슬슬 애들 학교 보낼 준비를 해야겠다.
미카엘과 로사에게, 그리고 영화 속 소년 메이슨을 안아 주며 이렇게 말하고 싶은 밤이다.
“안녕. 잘 자라 주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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