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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세이/<아빠의 비밀일기>

06. 보리차를 끓이며

by BOOKCAST 2022. 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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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리수거를 하려고 집안에 쌓여 있는 재활용 쓰레기를 주섬주섬 챙긴다. 플라스틱 생수병이 너무 많아도 너무 많다. 부피를 줄여보겠다고 찌그러뜨리긴 하는데, 그 정도로는 쓰레기로 몸살을 앓는 지구에 그다지 위로가 될 것 같지 않다. 나도 덩달아 체증에 걸린 듯 마음이 개운치 않다.
 
크리스 조던이라는 미국의 환경미술가가 있다. 그는 태평양의 미드웨이 제도에 수년간 머물며 사진을 찍고 영상을 만들었다. 그의 다큐멘터리는 인간이 자연을 훼손하고 기만해 온 참담한 현장을 파헤치고 있다. 무분별하게 버려진 플라스틱과 비닐들이 해류를 타고 바다 위를 떠다니다 앨버트로스(Albatross)의 서식지에 고여 생태계를 변질시킨다. 잔혹하고 날카로운 변화의 칼끝이 돌고 돌며 인간을 비롯한 온 지구를 통째로 위협하게 된다. 우리가 모두 범인이며 동시에 피해자인 이 공공연한 역설의 범죄는 지금 이 순간에도 아주 활발하고 가속적으로 벌어지는 중이다.
 
그의 작품은 오직 주제만이 뚜렷할 뿐 작업의 분야와 경계가 모호하다. 환경을 고발하는 종전의 작가들과는 달리 자연적 정경을 십분 활용하고 유명 고전 회화를 패러디하거나, 소재를 다채롭게 매시업하는 방식으로 서정적이며 세련된 분위기 속에 무겁지 않게 엄정한 메시지를 담았다. 정적인 풍경 연작 앞에 멈춰 세워 대자연의 미혹 속으로 이끄는가 하면, 인간 본성 안에 있는 이기심과 공격성을 차갑게 해부해 늘어놓으면서 내재한 죄의식을 자극하기도 한다. 만다라를 통해서는 ‘각자 떠나온 곳은 다르나 결국 우리는 하나’라는 동양의 구도(求道)적 세계관으로 본질과 진리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어떤 작품은 잔잔한 은유로써 감동과 명상을 불러일으키고, 또 어떤 작품은 작심하고 손톱으로 칠판을 긁는 것처럼 보는 이를 극단의 불안으로 몰고 간다. 영화로 비유하자면 허진호(팔월의 크리스마스)의 서정과 나홍진(곡성, 황해)의 엽기를 겸비한 작가라 해두겠다.
 
한국에서도 대여섯 번의 전국 순회 전시가 있었는데 2019년 여름, 순천대학교에서 순천전이 열릴 때 현장 운영을 맡아 진행하게 되었다. 전시를 설치하면서부터, 마무리하여 트럭에 실어 보낼 때까지 꼬박 한 달 반 동안을 크리스 조던의 작품 속에서 살았다. 그중에는 다큐멘터리 영상과 비디오아트도 몇 작품이 있었는데 그 대사나 효과음이 몇 년이 지난 아직도 귓가를 맴돈다.
 
나는 순천전이 끝나고 곧이어 열린 제주전을 보러 제주도로 날아갔다. 지겹도록 충분히 들여다본 전시였지만, 일로써가 아닌 순수한 관람객의 한 사람으로 미술관을 찾아 작품을 감상하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알게 모르게 상당한 애착이 생긴 터에, 제주전에서 마스터 클래스를 진행할 것이라는 작가를 직접 만나보고도 싶었다.
 
이 전시와 함께 한 그해 8월은 뜨겁고 강렬했다. 이 여름의 경험은 내게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을 뜨게 해주었다. 환경오염에 있어 ‘더 이상 객체가 아닌 주체, 피해자가 아닌 방조자이자 가해자로서의 나 자신’에 대한 직시가 바로 그것이다.
 
전시가 열리는 동안 많은 부모가 아이의 손을 잡고 왔다. 전시는 분명한 성황이었다. 그러나 이면에는 현장 관리자인 내 눈에만 보였던 아쉬운 모습도 있었다. 부모는 아이들이 잘 보고 이해하여 올바른 생각을 배워가길 바랐지만, 정작 자신들은 별 관심이 없었다. 대부분 데리고 온 아이들을 도슨트에게 인계한 뒤, 건성건성 뒤따르거나 밖에 나와 핸드폰이나 만졌다. 개념 있는 부모 소리를 듣기 위해 최소한의 요식행위만을 해치우려고 방문한 것이다. 어른들은 마치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이미 글렀는데 뭘. 습관을 고치기엔 너무 늦었다고. 이렇게 살다 죽으면 그만이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생각이다. 어른들이 이미 글러 먹은 것이야 새로운 사실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영 희망이 없는 존재도 아니다. 먼저 어른이 바뀌고 행동해야 나아진다. 왜냐하면 큰 문제는 어른들이 다 일으키기 때문이다. 심지어 저 생각은 솔직하지도 않다. 어른은 이제껏 쉽게 버리고 낭비하고 편하게 살아온 버릇을 고치기가 싫은 것이다. 우리는 눈 가린 채 어지르고 더럽히며 살 테니 너희들이나 잘 치우고 살라는 못된 심보다. 본래 맑고 푸른 아이들을 자기 죄책감 더는 데 함부로 갖다 쓰지 말지어다.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 버렸다
 
2리터짜리 빈 플라스틱 생수병을 모아 내놓는 대신 보리차를 끓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텀블러와 장바구니를 들고 다닌다. 거창한 구호는 부담스럽고 지키지 못할 약속이 될까 걱정스러워 싫다. 나는 그저 내 방 안의 작은 가구를 옮기듯 하나씩 습관을 바꿔가기로 했다. 우선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실천을 출발로 지구의 건강에 관심을 거두지 않을 참이다.
 
실천과 변화는 불편함을 받아들이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몸이 편한 습관을 고수하면서는 아무런 변화도 불러올 수 없다. 도심의 주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공청회를 하면, 갖가지 아이디어가 난무하면서도 만인이 만족하는 똘똘한 해결책은 나오지 않는다. 모두가 내 사무실과 내가 일보는 은행 옆에 큼직한 무료 주차장이 생겨나길 기대할 뿐, 아무도 저만치에 차를 대고 걸을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고향 순천은 대한민국 생태수도, 생태문화도시를 표방하고 있다. 2013년에 이어 2023년에 다시 열릴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는 한 번 쓰고 나면 애물단지가 되고 마는 규모나 시설 본위의 엑스포 같은 행사가 아니다. 생태와 정원을 그 주제로 하고 있다. 이 국가정원은 천혜의 습지인 순천만 갯벌과 갈대밭을 보호하기 위해 조성했다. 잘 꾸며진 생태의 정원은 앞으로 나무와 숲길이 우거지고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질수록 그 정취가 풍요를 더할 것이다. 누구 머릿속에서 나온 아이디어인지 몰라도 참 잘 골라잡은 미래적 아이템이 아닐 수 없다. 시민으로서 족히 자부심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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