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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가루전쟁>

02. 흑인 노예들의 역사가 서리다

by BOOKCAST 2022. 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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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로 접어들면서 유럽인들은 대서양 서쪽의 아메리카 대륙을 점령해나갔다. 그러면서 점차 늘어난 설탕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대서양의 마데이라제도, 카리브해의 아이티섬과 남미의 브라질을 비롯해 아메리카 지역에 사탕수수 재배 농장을 세웠다. 이 농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주로 아프리카에서 끌고 온 흑인 노예들이었다.

유럽인들은 아메리카 원주민을 붙잡아 노예로 부렸으나, 원주민들은 유럽인이 옮기는 전염병에 약해 많이 죽은 데다가 그들의 고향과 가까운 탓에 걸핏하면 도망치는 식으로 저항했다. 이에 유럽인들은 전염병에 잘 견디면서 도망칠 우려가 없는 먼 아프리카 흑인을 노예로 붙잡아 와서 부리는 방식을 택했다.

대략 1500년에서 1880년까지 최대 4천만 명의 흑인들이 노예선에 탄 채로 아프리카에서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으로 끌려갔다. 그들 대부분은 아이티를 중심으로 한 카리브해의 여러 섬에 세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했다.

카리브해의 작은 섬나라 트리니다드토바고의 총리 에릭 윌리엄스는 흑인 노예들과 설탕의 상관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만약 설탕이 없었다면 흑인 노예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흑인을 노예로 사고파는 노예무역은 설탕이 일으켰고, 이 노예무역에서 유럽 국가들이 벌어들인 수익이 산업혁명의 원동력이 되었다.”

설탕을 만들고 팔아 돈을 벌려는 유럽인들의 욕망이 아프리카인들을 노예로 만들었다는 뜻이 된다.

오늘날 미국, 브라질, 아이티, 쿠바, 도미니카 같은 아메리카 지역의 나라들에 살고 있는 흑인들 대부분은 아프리카에서 끌려와 백인의 농장에서 일하던 노예의 후손이다. 설탕 생산과 노예무역이 아메리카의 인종 분포도를 바꾸었다고 할 수 있다.

16세기 초반에는 설탕이 로마시대나 십자군원정 때처럼 부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1513년 포르투갈 국왕인 마누엘1세는 브라질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얻어낸 설탕으로 1.2미터 길이의 양초 300개와 12명의 추기경이 교황을 에워싸고 있는 커다란 모형 조각상을 만들어 교황 레오10세에게 보냈다. 설탕으로 사람 모형을 만들 만큼 포르투갈에 설탕이 많으며 그만큼 부유하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한 행동이다. 이는 이슬람 술탄들이 설탕으로 궁전 앞에 야자나무 모형을 만들어 전시하던 것과 같았다.

16세기 중반 이후 대서양 너머에 세운 사탕수수 농장들이 워낙 많아 설탕 가격이 낮아졌다. 1572년 프랑스의 학자 오르텔스는 《세계 무대의 축도》에 “ 약으로 팔렸던 설탕이 지금은 음식에 들어가는 첨가물이 되었다”라고 말했다. 이전 시대에 설탕 가격을 묘사한 기록들에 비하면 굉장히 달라진 현상이다. 1299년 부르고뉴 백작부인인 마오 다르투아는 15개의 설탕 덩어리를 시장에서 샀는데, 가격은 같은 무게의 은가격과 같았다고 한다. 또한 1515년 나바라왕국의 마르가리타 왕비는 작은 손톱 크기의 설탕 덩어리를 얻고서 그 가치가 변호사와 친구들에게 성대한 저녁 만찬을 대접할 정도였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설탕으로 벌어들이는 수익 자체가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흑인 노예들을 부려 얻은 설탕을 팔아 가장 많이 돈을 번 나라는 아이티를 지배하고 있던 프랑스였다. 아이티의 설탕 사업에서 나오는 수익은 아무리 줄어들었을 때도 최소한 프랑스 정부 1년 예산의 25퍼센트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17세기와 18세기 무렵, 아이티는 설탕을 팔아 벌어들인 수익 때문에 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었다. 다만 오해가 없기 바란다. 이 설탕 판매로 거둔 수익은 아이티에 살고 있던 3만 명의 프랑스인 지주와 프랑스 정부에만 돌아갔으며, 나머지 48만 명의 흑인 노예들은 가난에 찌든 채 살아야 했다. 프랑스의 수익을 올려주는 설탕은 프랑스인 농장주들이 휘두르는 채찍에 맞으며 일해야 했던 흑인 노예들의 피와 눈물로 만든 산물이었다.

 

카리브해의 섬에서 사탕수수를 베는 흑인 노예들을 묘사한 그림. 그림에서 묘사된 모습은 실제보다 훨 씬 순화한 것으로, 사실은 일이 몹시 힘들어 도망가거나 반란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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