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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가루전쟁>

03. 염전 싸움에서 혁명으로

by BOOKCAST 2022. 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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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의 수출이 나라를 부유하게 했다면, 소금의 수출이 막힐 경우 나라가 망할 수도 있었다. 16세기에 유럽의 최강대국으로 떠올랐다가 17세기에 이르러 국고가 바닥나 파산한 스페인이 그 좋은 사례다.

16세기, 스페인은 오늘날의 네덜란드를 식민지로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스페인인들은 개신교 계통의 칼뱅파를 믿고 있던 네덜란드인들에게 “너희들은 이단인 칼뱅파를 버리고 우리가 믿는 정통 교회인 가톨릭을 믿으라”고 강요하는 바람에 네덜란드에서는 스페인의 지배에 대한 반발심이 높아졌다. 결국 1566년 8월 10일, 네덜란드에서 스페인을 몰아내려는 폭동이 일어났다. 이 폭동은 곧바로 네덜란드와 스페인 사이의 네덜란드 독립전쟁으로 번졌는데, 이 전쟁은 이후 80년 동안 계속되었다.

네덜란드 독립전쟁에서 눈부신 활약을 보인 집단이 네덜란드의 독립군 중에서 해군이자 해적선이었던 이른바 고이센 함대였다. 고이센 함대는 스페인 상선들을 약탈하는 것뿐만 아니라 스페인의 남부 지역인 안달루시아의 항구들을 봉쇄하는 일도 맡았다. 이 해상 봉쇄로 인해 스페인은 파산 상태로 내몰렸다. 16세기 스페인의 안달루시아 지역에서 생산되는 소금의 대부분은 식민지였던 네덜란드로 수출하고 있었는데, 네덜란드 함대가 스페인이 소금을 팔지 못하게 항구를 틀어막아 돈줄이 끊긴 스페인은 빈사 상태에 처했다.

물론 당시 스페인은 현재 멕시코와 페루에 이르는 중남미의 방대한 지역을 식민지로 지배하고 있었고, 이들 지역에서 수탈한 막대한 양의 황금과 은을 자국으로 실어 오고 있었다. 하지만 스페인이 중남미에서 힘들게 가져온 금과 은은 막상 스페인의 국내 산업에 쓰이지 못한 채 제노바와 베네치아 같은 이탈리아 지역으로 빠져나갔다.

스페인 군대가 사용하는 무기의 대부분은 이탈리아가 만든 것으로, 스페인이 약탈한 황금과 은은 이탈리아 도시들에 무기의 거래 대금으로 쓰였다. 아울러 스페인의 왕족과 귀족들은 값비싼 보석을 수입하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겼는데, 이들이 보석을 해외에서 들여오기 위해 지불한 대가도 황금과 은이었다. 이렇다 보니 애써 가져온 황금과 은은 스페인의 국고를 늘리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스페인의 빈약한 해군력도 고이센 함대의 해상 봉쇄를 뚫지 못했다. 흔히 스페인이라고 하면 무적함대를 떠올리지만, 16세기 당시 스페인은 테르시오라고 불리는 긴 창과 화승총을 사용하는 보병부대로 대표되는 육군이 강력했을 뿐 해군은 그다지 뛰어나지 못했다.

네덜란드의 해상 봉쇄로 인해 1575년과 1596년 두 차례에 걸쳐 스페인 왕실은 파산선언을 하고 만다. 그러자 네덜란드에 주둔한 스페인 군대도 월급을 받지 못해 거지떼나 다름없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했고, 굶주린 배를 채우려 닥치는 대로 약탈을 일삼는 등 군기가 문란해져 네덜란드 독립군들에 패하고 말았다. 결국 1644년, 스페인은 더 이상 네덜란드를 지배할 힘을 잃은 채 네덜란드의 독립을 승인했다. 소금 판매가 막혀 스페인은 파산하고, 네덜란드는 독립에 성공했다.

한편, 중세 유럽은 소금에 세금을 매겼다. 그중에는 소금에 붙은 세금이 너무 높아 서민들이 소금을 잘 먹지 못할 때도 있었는데, 13세기 프랑스가 그랬다. 특히 프랑스 왕실은 사치와 향락이 심했기 때문에 재정 상태가 늘 적자였고, 손해를 보충하기 위해 소금에 세금을 무겁게 매겼다.

프랑스의 소금세는 신분 제도에 따라 불평등하게 정해졌다. 농부나 서민들은 왕실에서 할당량을 정해주는 대로 소금을 비싼 값에 강제로 사야 한 반면 왕족이나 귀족, 성직자 같은 지배 계급은 소금세를 지불할 의무가 없었다. 소금세의 불평등한 징수는 프랑스 국민들에게 큰 불만을 심어주었고, 결국 1789년 신분 제도의 폐지를 요구하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는 원인을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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