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용 꽃이 되길 거부한 열혈 독립운동가, 정칠성
수많은 사람의 인생을 바꾼 3.1 운동
‘3.1 운동’은 실패한 거사였다. 기획 주체에서 행동 단위로 이어지는 치밀한 각본이 마련된 체계 잡힌 운동이 아니었다. 일제의 억압에 분노한 수많은 군중이 저마다의 정념을 폭발시킨 ‘종잡을 수없는 운동’의 성격이 강했다.
고종의 인산(因山)을 애도하는 노인들과 국외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에 고무된 학생들, 지주에게 고리를 뜯겨 화가 난 소작농, 일자리를 빼앗긴 노동자, 주재소의 일제 경찰에게 얻어맞은 무지렁이, 시끌벅적한 광장을 지나칠 수 없었던 혈기 왕성한 청년들까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중구난방’과 ‘좌충우돌’은 당연했다. 만세 운동은 결국 일제 경찰에 의해 진압됐다. 민족이 염원하던 독립을 얻어내지 못했고, 운동에 참여한 많은 조선인은 고통스러운 처벌을 받아야만 했다.
이렇듯 결과론적 시각에서 보면 3.1 운동은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큰 좌절과 시련을 안겨준 사건이었다. 하지만 3.1 운동을 마냥 실패한 운동으로만 치부할 순 없는 중요한 사정이 있다. 만세 운동에 참여한 수많은 사람의 사연과 처지는 그 숫자만큼이나 제각각이었지만, 3월 1일은 그 다양한 에너지가 한데 모여 분기하는 전환점이었다.
이날의 만세 사건은 실제적인 차원에서 우리나라 대중 ‘민주주의’ 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순간이었고, ‘공화주의(共和主義)’를 향한 도저한 첫발을 내딛는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3.1 운동을 계기로 창설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현재 우리가 몸담고 있는 대한민국 ‘법통’과 ‘체제’의 헌법적 기원이기도 하다. 한국 근대 민주주의 체제의 실효적 시작을 1919년으로 손꼽는 이유다.
3.1 운동은 무단통치 일변도였던 일제의 지배 방식에도 변화를 야기했다. 조선인들의 폭발적인 저항을 목격한 일제는 크게 당혹스러워했다. 해방을 꿈꾸는 조선인들의 응축된 힘과 대단위의 열정을 처음으로 목격했기 때문이다.
일제에게 피식민자의 정동(情動, Affect)은 이해와 공감이 불가능한 항목이었기 때문에, 만세 부르는 조선인은 그저 체포하고 구금해야 할 대상으로만 간주됐다. 지배하고 통치하려는 자들에게는 피지배자들이 함께 모여 이야기하고 행동하는 것에 대한 공포심이 존재한다. 성난 군중들이 한데 모여 봉기하면, ‘체제’를 전복하고 ‘규율’을 무너뜨릴 정도로 그 파급력이 대단하다는 사실을 알고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권력은 군중의 시위와 집회를 조속히 해산하려 했고, 어떻게든 군중이 모이지 못하게 만들고자 골몰했다. 흔히 사회를 보호하려는 조치라고 말하지만, 실상 위기를 감지하는 데에만 특화돼 있는 지배자들의 특성을 보여주는 행위다.
“기름에 젖은 머리 비어 던지고”
1919년 3월 1일 들불처럼 번진 만세 운동의 현장에는 ‘정금죽(丁錦竹)’이 있었다. 그녀는 경성의 ‘한남권번’ 소속 기생이었다. ‘기생조합’ 혹은 ‘기생학교’라고 불렸던 ‘권번(券番)’에 속해 있는 기생들은 신분과 지위가 천차만별이었다.
역할과 위상에 따라 ‘일패’, ‘이패’, ‘삼패’로 나뉘어 불리기도 했다. ‘기’와 ‘예’를 다루는 전통적인 기생은 ‘일패’라 불렸다. 연회나 의례에 참여하는 관기의 내력을 이어받은 이들이었다. 정금죽은 대구를 주름잡고 경성으로 진출한 이름난 ‘일패’ 출신 기생이었다.
잡지 <삼천리>(1931년 7월호)에 따르면 “정 여사는 장안을 울리던 명기였다. (대구에서 활동하다) 뒷날 서울에 올라오매 가무 잘하고 버들잎같이 기름한 아름다운 그 얼굴은 3.1 당시까지 경국(傾國)의 소리를 들었다.”
화류계의 기생이 만세 운동에 참여하니, 사람들은 그녀를 “사상(思想) 기생”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물론 이 호칭에는 양가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만세 부르는 기생’에 대한 ‘놀람’과 ‘비꼼’이 혼재된 별명이었다.
3.1 운동은 정금죽에게 자기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순간이자 폭발적 성장의 계기를 제공한 전환점이었다. 수많은 사람과 함께 “조국 독립”과 “민족 해방” 구호를 외친 경험은 그녀에게 벅찬 감동을 선사했다. 정금죽은 “흥분에 넘치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시위에 참여했다. 기름에 젖은 머리를 탁 비어 던지고 일약 민족주의자가 됐다”고 스스로 말한다.
그날 이후 그녀는 더 이상 기생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본명인 정칠성(丁七星, 1897~?)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기생에서 사회운동가로 변모한 그녀를 사람들은 흥미롭게 지켜봤다. ‘3.1 당시! 그때는 누구나 정치객이었다. 노인들도 어린아이들도 누구든지 국가와 민족을 말하고 또한 흥분하여서 열이 올랐었다. 백마를 타고 은편(銀鞭)을 마복(馬腹)에 호화롭게 던지며 장안네거리 좁다 하고 돌아다니던 정 여사의 가슴속에도 정치의 불이 붙기 시작하였다. 그 호화롭던 생활을 하루아침에 헌신짝같이 차버리고 동경(東京)에 내달아 기예학교를 마치고 난 정칠성 여사의 비약은 실로 일세를 놀래기에 충분했다.’(‘현대 여류 사상가들’, <삼천리>, 1931년 7월호) 그 시절 황금정(지금의 을지로)에서 승마를 즐길 정도로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던 정칠성이 거친 독립운동의 세계로 뛰어들었으니 사람들이 눈길을 주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러나 당시 정칠성에 대한 세간의 관심은 여성 독립운동가를 향한 차별적인 시선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만세 운동에 참여한 뒤 열혈 민족주의자로 변신한 그녀의 행동과 실천에 대한 정당한 평가보다 기생 이력을 밝히는 데 혈안이 돼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운동가로 변모한 뒤에도 기생 출신이라는 낙인은 그녀를 따라다녔다. 심지어 50년이나 지나도 언론은 그대로였다. 그녀를 “실연(失戀) 끝에 단발미인(斷髮美人) 여학생이 된 기생”(‘근세풍물야화-기생’, <경향신문>, 1978년 8월 28일)으로 세평하고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그녀는 대범하게도 자신의 출신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자원으로 삼아 세상에 힘껏 맞섰다.
‘이 사회를 알고 또 이 사회에 대한 나의 지위와 의무를 깨달은 뒤부터는 생리적 조건 같은 것은 아무 문제가 아니 되었습니다.
여자라고 사내들이 할 일을 못 하란 법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의 당면한 일은 사내가 더 잘하고 여자가 더 못하란 법이 없는 그런 엄숙한 일이외다. 그리고 돈은 있어 무얼 하며 또 없으면 어떠합니까. 모든 것은 우리 앞에 문젯거리가 아니 됩니다. 있어도 살고 없어도 살겠지요. 다만 피 있는 인간이면 누구라도 뛰어들고야 말 그 일에 우리 몸을 바칠 생각만이 있을 뿐이겠지요.’(‘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삼천리>, 1929년 6월호) 3.1 운동 참여 이후 10년간 여성운동과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자신의 삶을 소회하는 정칠성의 고백은, 그녀가 페미니즘에 입각한 민족지도자로서의 ‘덕성’과 ‘자질’을 훌륭히 갖추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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