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최초의 고공투쟁 노동자, 강주룡
‘해고자’와 ‘철거민’, ‘장애인’과 ‘난민’ 같은 이들은 때때로 가장 높은 곳에 오른다. ‘크레인’과 ‘공장 굴뚝’, ‘송전탑’, ‘건물 옥상’, ‘한강 다리’ 등이 바로 그곳이다. 억울하고 분한 일이 해결되지 않고 앞이보이지 않을 때, 높은 곳에 올라가야만 비로소 세상 사람들이 눈길을 보내고 귀를 기울여주기 때문이다.
‘가장 높은 곳’에 ‘가장 낮은 자’들이 올라가게 된 까닭이다.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운 고공농성은 보통 사회적 약자들이 목숨을 걸고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투쟁 방법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고공농성’을 한 사람은 일제강점기 여성노동자 강주룡(姜周龍, 1901~1931)이다. 그녀는 평양 ‘평원고무공장’ 여공이었다. 1931년 5월 29일 강주룡은 평양의 상징인 대동강 ‘을밀대’에 올라 농성을 시작했다. 을밀대에서 끌려 내려와 구속된 뒤에도 단식으로 저항하다 석 달도 안 돼 죽고 말았다. 1931년 8월 13일, 그녀 나이 겨우 서른하나였을 때다.
식민지 조선 여성의 파란만장한 삶
짧은 삶을 산 강주룡의 생애는 파란만장했다. 많은 이가 여장부라 칭송했지만, 그녀 역시 ‘식민지 조선의 여성’으로서 불행한 일이란 불행한 일은 모조리 겪었다.

그녀는 1901년 평안북도 강계(江界)에서 태어났으나, 14세 때 그녀 가족이 가난을 견디지 못하고 간도로 이주한다. 20세 때 서간도 통화현(通化縣)에서 다섯 살 적은 ‘최전빈(崔全斌)’을 만나 결혼한 뒤, 함께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을 했다.
나이 어린 남편보다 그녀가 더 돋보이는 일이 많았다. 최전빈은 그런 강주룡의 용맹과 열정을 두려워했다. 독립군 부대장 ‘백광운(白狂雲, 본명 채찬(蔡燦))’과 그녀 사이의 불륜을 의심한 최전빈은 강주룡을 친정집으로 돌려보낸다. 터무니없는 의심이었지만 아내된 강주룡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최전빈이 병환으로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는 독립군 부대로 돌아간다. 남편을 살리기 위해 손가락을 찢어 피를 받아 먹이기까지 했건만 최전빈은 끝내 죽고 만다.
시댁을 찾아가 남편의 사망 소식을 전하자, 시부모는 강주룡을 “남편 잡아먹은 년”이라 욕하며 그녀를 살인죄로 고소하기까지 한다. 수모를 당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지만 친정아버지마저 그녀를 차갑게 대한다.
더는 견디지 못하고 간도에서 조선으로 다시 옮겨간 강주룡은 황해도 사리원(沙里院)에 터를 잡지만, 집주인 영감에게 겁탈당할위기에 처하는 일도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그 영감의 재취자리로 그녀를 보내려고 했다.
강주룡은 절망하며 평양으로 떠난다. 이후 평양 평원고무공장에 들어가선 노동조합에 가입해 노동운동가의 길을 걷는다. 핍진한 삶을 살아왔던 식민지 조선 여성에서 굳센 여성 노동운동가로 변신한 것이다.
강주룡은 여공들의 저임금과 공장 내 성추행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그녀는 노조의 단체교섭권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만이 노동자의 권리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여겼다.
을밀대 지붕 위에 올라가 외친 구호
1929년 조선고무공업계는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휘청거린다. 공장주들은 불황을 타개하고자 임금 인하를 단행한다. 하루에 열다섯 시간을 넘게 일해도 고무신 한 켤레 값도 못 되는 일당을 받던 노동자들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처사였다.
1930년 8월 사용자 연합이었던 ‘평양고무공업조합’이 기존 임금에서 17%를 삭감하겠다는 방침을 노동자들에게 일방적으로 통고한다.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노동자들은 일제 권력과 결탁한 자본가들을 비판하며 반대 투쟁을 일으킨다.
1년이 다 되도록 이어진 투쟁에도 결과를 얻어내지 못하자, 1931년 5월 16일 평원고무공장 여공들은 단체 단식 파업에 돌입한다. 평양 전체 2,300명이 넘는 고무직공들을 대표해 평원고무공장 여공들이 앞장서 투쟁을 전개한 셈이다.
단식 파업을 주도하던 강주룡은 일제 경찰의 파업해제 조치로 여공 20여 명과 함께 공장에서 쫓겨난다. 그녀는 내몰린 신세였지만 주저앉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무산자들의 단결과 노동생활의 안정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에 대해서만 고민했다.
그녀는 평양의 이름난 2층 누각 을밀대 지붕 위에 올라가 평양시민들에게 호소하기로 마음먹는다.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한 새벽, 광목을 찢어 줄을 만들고 아무도 모르게 을밀대 지붕 위로 줄을 던져 올렸다. 줄타기하듯 간신히 올라간 지상 12미터 을밀대 지붕 위에 앉아 아침 해가 떠오르기를 기다렸다.
날이 밝자 사람들은 낯선 풍경에 깜짝 놀랐다. 웬 젊은 여자가 을밀대 지붕 위에 올라앉아 있으니 놀랄 수밖에. 그렇게 몰려든 사람들에게 강주룡은 “여성 해방, 노동 해방” 구호를 목이 터지도록 외쳤다.
신문은 이날의 사건을 대서특필했다. ‘을밀대 옥상에 올라가 파업선동의 연설’(<매일신보>, 1931년 5월 30일), ‘아사동맹을 지속, 을밀대에서 철야 격려’(<조선일보>, 1931년 5월 30일), ‘평양 을밀대에체공녀 돌현, 사십여 척 고공에서 연설까지’(<동아일보>, 1931년 5월 31일) 등 기사가 쏟아졌다.

<동아일보>는 강주룡이 ‘무산자의 단결과 고용주의 무리를 타매하는 연설을 하였다’고 전한다. 잡지 <동강>(1931년 7월호)은 ‘끝까지 임금 감하를 취소치 않으면 나는 근로대중을 대표하여 죽음을 명예로 알 뿐’이라는 강주룡의 연설 내용을 보도했다. 이후강주룡은 ‘여류 투사 강여사’와 ‘평양의 히로인’ 등으로 불렸다.
그중 ‘체공녀(滯空女)’라는 별칭이 가장 유명했는데, ‘공중에 떠 있는 여자’라는 뜻이었다. 강주룡이 처음 선보인 고공농성은 일제 치안 당국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가부장제 관념이 강했던 조선 사회에서 말 그대로 ‘암탉’이 ‘지붕’ 위에 오른 셈이었고, 건장한 남성 운동가도 하지 못한 일을 여성의 몸으로 처음 해낸 대단한 사건이었다. 어떤 이들은 탄식했지만, 다른 이들은 경탄했다.
강주룡은 “누구든지 이 지붕 위에 사다리를 대 놓기만 하면 나는 곧 떨어져 죽을 뿐”이라고 외쳤다. 하지만 일제 치안 당국은 을밀대 지붕 위에서 끝까지 버티던 그녀를 강제로 끌어내려 수감했다.
그녀는 감옥에서도 단식을 실행하며 농성을 이어갔다. ‘겁박’과 ‘투옥’도 그녀의 뜻을 굽힐 수 없었다. 그녀는 “대중들을 위해 희생하여 얻은 명예가 내가 배운 최고의 지식”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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