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 김점동
“저를 난로에 집어넣지 마세요”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처음으로 스크랜튼 부인을 만났을 때, 어린 소녀는 겁을 잔뜩 집어먹고 있었다. 구한말인 1885년 아홉 살 된 조선인 소녀에게 생전 처음 본 외국인 선생은 너무나 낯선 존재였다. 조선인과 다르게 생겨,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사용하는 서양인은 무섭고 기괴하게만 보였다.
선교사이자 교육자였던 스크랜튼(Mary F. Scranton) 부인이 미소를 띠며 어린 소녀에게 난로 가까이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하지만 소녀는 덩치 큰 서양 여자가 자신을 붙잡아 난로 속 뜨거운 불구덩이로 던져 넣을 것만 같았다. “저를 난로에 집어넣지 마세요.” 소녀는 아버지 손을 꼭 붙잡은 채로 뒤로 한 발짝 물러서며 몸서리쳤다. 소녀가 서양식 난로를 본 것도 그날이 처음이었다.
훗날 조선 최초의 여의사가 된 김점동(金點童, 1877~1910)이 이화학당에 입학할 때 겪었던 일을 재구성한 것이다. 당시 아이들 사이에선 서양 사람들이 조선의 어린애들을 잡아먹는다는 괴담이 퍼져 있었다.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이었지만, 그런 종류의 이야기는 어린애들 사이에서 삽시간에 퍼져 나가기 마련이었다. 어른들이 아무리 타이르고 다독여도, 아이들은 무서운 생각이 한 번 머리에 박히면 떨쳐내기 어렵다.
사실 어린애들 사이에서 떠도는 낭설이나 뜬소문은 서양 사람에 대한 당시 조선인들의 태도와 인식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선교사의 직분과 근대 교육의 사명을 지니고 조선에 들어온 서양인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었지만, 아직까지 조선에서는 그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지 않았다. 어린 김점동에게 벽안(碧眼)의 이방인은 더욱 두렵고 낯선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김점동은 일찍 개화한 아버지 김홍택 덕분에 1886년 5월 정식으로 문을 연 이화학당의 네 번째 학생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 한양의 정동(貞洞)에 살았던 김홍택은 일찍이 서양 사람들을 접할 기회를 많이 얻었다.

당시 조선의 본궁 역할을 하던 덕수궁과 조선 황제의 거처로 쓰이던 경희궁 사이를 잇는 동네였던 정동에는 막 조선으로 들어온 외교관과 선교사들이 자리를 잡고 있던 터였다. 그중에서도 김홍택이 일을 돕고 있던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HenryGerhart Appenzeller)는 한국 최초의 근대식 학교인 ‘배재학당’과 최초의 개신교 감리교회당인 ‘정동교회’를 세워, 한국 근대 교육과 기독교 전파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주변의 경관과 분위기가 바뀌는 모습을 본 김홍택은, 서양의 언어와 학문을 배워야만 앞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펜젤러의 동료 스크랜튼 부인이 이화학당을 정식으로 열기도 전부터, 셋째 딸 김점동을 아펜젤러의 집에 머물게 하며 근대 교육을 받게 했다.
로제타 선생님과 여성 전문 병원 ‘보구여관’
스크랜튼 여사가 설립한 것으로 알려진 ‘이화학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여학교이다. ‘이화여대’와 ‘이화여고’의 전신으로 역사적으로도 가장 오래된 여성 전문 교육기관으로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이화학당의 출발은 초라하고 궁색했다. 작은 집의 방 한 칸에서 겨우 네 명의 여학생을 데리고 수업을 시작했다. 학비도 받지 않고 먹이고 재워주기까지 한다는데도, ‘서양 도깨비’가 운영하는 학교에 아이를 맡길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는 수 없이 이화학당에서 영어를 배우고 근대 학문을 배울 수 있는 기회는, 가정 형편이 정말 어려운 집안의 딸이나 김홍택처럼 서양 문화에 개방적인 집안의 딸에게만 돌아갈 수 있었다.
이화학당은 서양 선교사와 함께 생활하며 교육도 받는 기숙학교 형태로 운영됐다. 처음에는 부모에게 버림받은 것처럼 의기소침하고 침울하게 지내던 김점동도 점차 그곳 생활에 적응했다.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던 영어도 조금씩 귀에 익숙해지고 곧 더듬더듬 구사할 수 있는 수준이 됐다.
자신에게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두려움을 떨쳐내자 이내 학교생활도 재밌고 열정적으로 하게 됐다. 이화학당은 기독교리를 앞세워 운영하는 학교였기 때문에, 김점동 역시 곧 세례를 받고 ‘에스더(Esther)’란 이름을 받았다. 김점동은 이후 자신을 ‘에스더김’이라고 소개했다. 스크랜튼 여사와 함께 이화학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Sherwood Hall) 선생님은 영민한 김점동을 특히 아끼고 사랑했다.

로제타 여사는 교육자인 동시에 의사이기도 했다. 1888년 로제타는 이화학당 바로 옆에 한국 최초의 근대식 여성 전문 병원인 ‘보구여관(保救女館)’을 세우고, 조선 여성들에게 의료 활동을 펼쳤다. 보구여관은 숙박업소가 아니라 ‘여성을 보호하고 구하는 기관’이라는 뜻이다.
이때 영어를 할 수 있었던 김점동이 로제타를 도와 통역과 진료를 보조했다. 당시 조선에서 여성들의 위생과 건강 상태는 처참한 수준이었다. 그전까지 많은 여성에게 고통을 줬던 생리계통과 산부인과 질환은 드러내놓고 치료를 받을 수도 없었다. 여성들은 몸이 아파도 참고 버티는 것만을 미덕으로 알았다.
여자가 진료하고 돌봐준다는 여성 전문 병원이 문을 열자, 조선여성들에게 금방 소문이 났다. 서양 여의사에게 치부를 내보이고 몸을 맡기는 게 꺼림칙하긴 했지만, 그곳에 가면 조선어와 영어를 통역해 주는 영특한 소녀가 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부인들은 안심하고 보구여관을 찾을 수 있었다.
김점동은 차츰 통역 역할을 뛰어넘어, 로제타 선생의 치료와 수술을 보조할 수 있는 수준이 됐다. 인력과 장비가 태부족이었기 때문에 밤을 새기 일쑤였으나, 김점동은 사력을 다해 환자들을 돌봤다.
김점동은 조선 여성들을 진료하는 데 헌신적이었던 로제타 선생님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 조선인 화상(火傷) 환자에게 자신의 피부를 이식하겠다고 선뜻 나서는 선생님은 ‘살아 있는 성녀’처럼 보였다.
김점동 역시 환자들을 간병하는 데 열심이긴 했지만, “가족도 아닌 이에게 내 살과 피를 내줄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김점동은 이때 일을 계기로, 의사가 돼 차별받는 부인들과 가난한 이들을 치료해 줘야겠다고 결심한다.
'역사·문화 > <역사에 불꽃처럼 맞선 자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05. 유토피아를 꿈꾼 사회주의자의 선택적 기억법 (1) | 2022.06.14 |
---|---|
04. 중늙은이 나이, 비행기에 인생을 건 사나이 (2) | 2022.06.13 |
02. 3.1 운동이 배출한 최고의 ‘아웃풋’ (1) | 2022.06.10 |
01.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간 가장 낮은 자 (2) | 2022.06.09 |
00. <역사에 불꽃처럼 맞선 자들> 연재 예고 (1) | 2022.06.0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