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정부 공식 문화인, 정연규
추방된 식민지 조선인 작가, 문화인으로 부활하다
1962년 6월 26일 서울시 교육국 문화과는 문화예술인들의 관리와 지원을 위한 목적으로 공식 문화인 등록 사업을 시작한다. 신문 보도에 의하면 이때 소설가 김동리와 화가 김환기를 제치고 제1호로 등록한 사람은 2년 전 1960년 10월 25일 일본에서 귀국한 정연규(당시 나이 62세)였다.
정연규(鄭然圭, 1899~1979)는 문교부 명령에 따라 서울시가 ‘문화인 등록’을 개시한 첫날 서울시청을 방문해 증명사진 두 장을 제출하며 예술인 등록원부에 “1922년 11월 『혼(魂)』, 『이상촌(理想村)』등 배일(排日) 소설을 썼다가 일본으로 추방되었으며 그밖에 일본에서 『정처 없는 하늘(さすらひの空)』 등을 썼다”고 밝혔다. 정연규가 제출한 서류에 기록된 내용 중 가장 강조된 것은, 식민지 시기 저술 작업을 통해 일제에 저항의식을 드러냈다는 이유로 작품이 압수됐던 이력과 그와 같은 사정 때문에 일본으로 추방됐다는 처벌에 관한 내용이었다.
식민지 시기 검열 경력과 처벌 이력을 적어낸 그는 당연하게도 문화인 등록 심사에서 충분한 자격을 갖춘 인물로 간주됐다. 결국 그는 우리나라 문화인 제1호로 등록된다.
정연규가 직접 적어낸 행적은 어느 정도 사실인 것으로 드러났다. <동아일보> 사회면에서 “한성도서주식회사 발행 정연규 씨저작인 소설 『혼』 초판은 지나간 오일에 발행할 예뎡이든 바 돌연히 압수되얏다더라”라는 기사(1921년 7월 14일)를 확인할 수 있다.
1922년 이후 정연규는 일본으로 이주해 도쿄에서 저술과 출판 활동을 지속했다.
그런데 정부의 ‘문화인 등록’ 사업은 당시 문화계에서도 제도의 목적과 실행과정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었다. 당시 문화 예술계는 이 사업을 전혀 환영하지 않았고 오히려 불편해하는 기색을 노골적으로 표현했다.
문화예술 분야 각 계를 막론하고 ‘문화인 등록’의 절차와 방법을 문제 삼는 의견이 속출했다. 등록 사업을 시행하는 정부의 의도와 목적은 곳곳에서 의심받았다. 알량한 지원을 핑계로 문화인을 단속하고 관리하겠다는 당국의 처사에 분노한 까닭이다.
불세출의 반일 사회주의자, 허풍선이 되다
그렇다면 정연규는 왜 다른 문화예술가들이 배척했던 ‘문화인 등록’ 사업에 기다렸다는 듯이 서둘러 응했을까? 당시 그가 남긴 저작물을 검토해 보면 그 이유를 대강이나마 짐작해 볼 수 있다.
1960년대 정연규는 일본에 대한 경계와 공산주의에 대한 거부감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글을 썼다. 그의 저작 『일본이 또 우리나라 침략을 시작했다』(민족사상사, 1961)와 『간접침략』(금영출판사, 1965)은 극단적인 일본 혐오 정서와 반공 의식을 드러내고 있는 저작물이다.
『일본이 또 우리나라 침략을 시작했다』는 친일파를 시급히 청산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친일파 세력들이 해방 후에도 한국 사회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는 부조리를 지적하고, 점차 가속화되고 있는 일본 문화의 침투 현상과 그에 따른 ‘문화 오염’을 경계한다. 더 나아가 여전히 비루하게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들의 고단한 삶에 대한 관심을 국가적 차원에서 확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간접침략』은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남한 사회로 침투해 세력을 확대하고 있으며 사회 불안을 조성하고 안전을 저해하고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공산주의자들을 막기 위해 일어난 ‘5.16 혁명의 위대함’을 깨치고, ‘북괴의 간접침략을 분쇄하여 국가 기강을 확립’하자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정연규가 두 편의 저작을 통해 전하고 있는 메시지는 명료하다. ‘반일(反日)’과 ‘반공(反共)’. 그가 생각한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친일 역사에 대한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과 북한 공산주의 세력이 대한민국의 체제를 위협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일제로부터 억압받았던 과거 행적을 드러내며 지금 자신이 이러한 주장을 할 권한이 있다고 강변한다. 그가 자신의 과거를 일제로부터 검열당한 기억과 관련해 술회하는 까닭은 반일과 반공 주장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식민지 시기 검열 경험은 해방 이후 문화예술인들에게 일종의 면죄부 역할을 했다. 친일 행적으로 비판받다 해방 후 우익 진영에서 문단을 이끈 유명 작가 ‘김동리’ 역시, “자신의 작품 3분의 1이 일제의 검열 때문에 사라졌다”는 회고를 남긴 바 있다.
검열받았던 경험에 대한 회고는 친일 경력자조차 반일 투사로 둔갑시키는 마술이나 다름없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검열에 대한 기억과 회고의 강도는 과장되기 일쑤였다. 신생 국가 대한민국에서 살아남거나 성공하려는 의지가 강한 사람들에게 일제 검열 경험은 일종의 든든한 밑천 역할을 했다.
그래서인지 해방 이후 발표된 정연규의 저작물에는 공통적으로 필자의 자기소개가 상당히 장황하게 기록돼 있다. ‘필자소개’에는 식민지 시기 저술 활동 중에 겪은 검열과 압수 조치(1921), 국외추방(1922), 탈출(1922), 일본어 소설 집필(1923) 등 과 관련된 회고가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어떤 경우는 책의 본문보다 자신을 소개하는 데 더 집중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간접침략』에 실려 있는 32페이지 분량의 ‘필자소개’에 따르면, “1921년 『이상촌』과 『혼』 집필 이후 일제의 검열조치 후 압수 처리되고 구속되어 1922년 11월 11일 23세의 나이로 결국 조선에서 쫓겨나 일본으로 갈 수밖에 없었는데, 미야자키(宮崎) 산중에 있는유형수촌(流刑囚村)에 감금되었으나 곧 탈출해 동경에서 <아사히신문(朝日新聞)>, <지지신보(報知新聞)> 등에 기고하는 등 신문기자 생활을 했다”고 나와 있다.
1923년 ‘관동대지진’이 일어났을 때에는 일본인들에게 학살된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의 시신을 홀로 수습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젊은 시절의 그는 물불 가리지 않는 아나키스트요, 배짱 있는 사회주의 혁명가였다. 그러나 정연규의 회고는 검증을 요하는 부분이 많다. 일례로 『혼』의 압수 이력은 1924년 한성도서주식회사 재판본 판권지와 초판 압수 당시 언론 보도를 통해 확인 가능하나, 검열 관련 구속 및 국외추방(정확히는 선외(鮮外)추방)에 대한 내용은 공식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일본 내지(內地)의 감옥에 수감된 정연규가 곧 탈출해 한 달간 영을 헤매는 듯 고달프게 도망다니면서 한 달 만에 500페이지가 넘는 장편소설을 썼다는 내용도 믿기 어렵다. 더구나 탈출자의 신분으로 곧바로 일본 공식 문단에 데뷔해 활동한다거나 <아사히신문> 기자로 봉직했다는 이야기는 허무맹랑할 정도이다.
실제 <아사히신문> 직원록을 살펴봐도 정연규의 근무 기록은 없다. 몇 차례의 투고와 게재 경험을 ‘조일신문 정기자 생활’로 과장한 듯하다. 흥미로운 것은 그의 형 ‘정연기(鄭然基)’와 정연규는 초계정씨(草溪鄭氏) 일파 문중의 유력한 명망가이자 현대 인물로 족보에 등재돼 있다는 점이다.
초계정씨 족보에 따르면 형 정연기는 ‘전북지사’로 기록돼 있고, 정연규는 ‘재일조일신문 기자’로 각각의 경력사항이 기재돼 있다. 뭔가 석연치 않은 대목이다. 허풍선이 냄새가 강하게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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