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어진 ‘무등산 타잔’, 박흥숙
가난한 독학생이 잔혹한 살인범으로
박흥숙(朴興塾, 1957~1980)은 1977년 4월 20일 광주 무등산 덕산골에서 쇠망치로 사내 넷을 죽였다. 살해당한 이들은 무등산 일대의 무허가 주택을 철거하고자 나온 광주시 동구청 건축과 녹지계소속 철거반원들이었다. 출동한 철거반원 일곱 명 중 일찌감치 빠져나간 한 명을 제외하고 여섯 명을 모조리 때려죽이려 했다.
박흥숙은 살인 및 살인미수 혐의로 1977년 9월 일심 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다. 이후 고등법원에서도 항소는 기각됐고 대법원 역시 원심을 받아들여 사형이 확정됐다. 광주교도소에서 3년동안 수감 생활을 하다 1980년 12월 24일 형 집행을 당했다.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그해 겨울 광주에서 일어난 최초의 사형 집행이었다.
이 사건은 집을 잃은 철거민의 절규와 막다른 길에 내몰린 빈민의 마지막 저항이라는 관점으로 다뤄지지 않았다. 호사가들은 살해범 박흥숙을 ‘무등산 타잔’이라 불렀다.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박흥숙은 ‘무등산을 날다시피 뛰어오르고’, ‘흉내 낼 수 없는 무공을 익혀 이소룡도 당하지 못할’ 정도의 대단한 무술가로 묘사됐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165cm가 채 되지 않는 키에 마른 몸을 가진, 당시 한국 남성의 평균 신체 조건에도 미치지 못하는 왜소한 사내였다. 그가 날다람쥐마냥 무등산을 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집이 몹시 가난해 광주 시내에 기거할 집이 마땅치 않아 산 깊숙한 곳에 토막을 짓고 살 수밖에 없었던 형편 때문이었다.
대단하다고 알려진 무술 솜씨 역시 어린 시절 굶주려 허약해진몸을 단련하기 위해 매일같이 운동 및 수련에 힘썼던 결과가 부풀려 전해진 이야기다.
살인이라는 행위 자체는 결코 옹호될 수 없지만, 박흥숙 사건은 무리한 철거 집행으로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빈민이 극단적으로 저항하다 벌어진 참극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런데도 관과언론은 비참하게 내쫓긴 철거민의 실상은 숨기고, 사제 총과 ‘오함마’ 등 자극적 소재만을 앞세워 그를 극악무도한 살인범으로 연출했다.
설상가상으로 검거 이후 그에게는 용공 혐의마저 추가됐다. 평소 영험한 기운이 많은 것으로 알려진 무등산에서 무당들이 굿하는 것을 뒤치다꺼리했던 그의 어머니에게는 미신 풍습이라는 전근대적 야만성마저 덧씌웠다. 그렇게 ‘무당골의 타잔’이란 괴물이 만들어졌다.
“가난한 사람은 이 나라 국민이 아니란 말인가”
무등산 자락에는 광주 시내에서 거주지를 마련하지 못해 도심에서 밀려난 빈민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박흥숙은 그중에서도 무당들이 집단으로 모여 살던 무등산의 가장 외진 곳이었던 덕산골 일대의 험지에 자리를 틀었다.
어머니는 무당들이 굿을 할 때 제사 상차림을 돕는 대가로 남은 음식을 얻거나, 의식이나 재물로 쓰고 남은 비단, 명주, 실 따위를 수습해 푼푼이 돈을 모았다. 1974년부터 자리 잡고 살기 시작한 토막집에 이태 전부터 철거 계고장이 날아들어 왔지만, 박흥숙과 그의 가족들은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자세히 알지 못했다.
20여 호가 모여 살던 빈민촌에 여덟 가구만 남게 되었을 때, 박흥숙도 이제 곧 덕산골을 떠나야 할 때가 올 거라고 생각했다. 철거반원들이 들이닥친 1977년 4월의 그날, 박흥숙은 당혹스러웠음에도 불구하고 철거 집행에 순순히 응했다고 한다. 그런데 철거반원들은 가재도구를 끌어낼 시간도 주지 않고 집안에 다짜고짜 불부터 놓았다.
당시 어렵게 모은 전 재산 30만 원을 천장에 숨겨놓았던 어머니가 집이 활활 불타는 모습을 보고 실성한 듯 돈을 꺼내려 불이 난집으로 달려들었다. 철거반원들이 그런 어머니를 거칠게 가로막았다. 박흥숙의 어머니는 숨겨놓았던 돈도 꺼내지 못하고 철거반원들에 의해 바닥으로 밀쳐 넘어져 흙투성이가 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저들도 위에서 시키는 일을 하는 것일뿐”이라며 철거반원들을 원망하지 말자고 어머니께 말했다고 한다. 손수 지은 집이 타버리고 어머니가 힘들게 모았던 전 재산 30만 원마저 찾을 수 없게 된 절망적 상황에서도 이성의 끈을 놓지않았다.
박흥숙이 철거반원들에게 요구한 것은 단 한 가지였다. 위쪽 골짜기에 늙고 병든 부부가 함께 사는 움막이 있는데, 그 집만은 불태우지 말아 달라는 부탁이었다. 자신들은 어떻게든 다시 일어설수 있지만, 그 노부부는 움막을 잃게 되면 완전히 끝장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철거반원들은 그의 마지막 부탁을 매몰차게 무시했다. “젊은 놈이 가만 놔두니 계속 나선다”며 욕을 하고는 기어코 노부부의 움막에까지 내처 불을 질렀다.
여기까지 이르자 크게 분노한 박흥숙은 사제 총을 가져와 철거반원들을 위협하고 그들을 전부 포박했다. 그렇게 해야만 철거반원들의 행위를 멈추게 할 수 있었다. 그는 철거반원들을 제압만하고 폭행을 가하지는 않았다. 철거반원들에게 광주시장을 함께찾아가 가난한 사람들의 집을 불태우는 것이 정당한 일인지 따져묻자고 말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철거반원들은 박흥숙의 인내력과 절제심을 다른 방식으로 이용했다. 상황이 그렇게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눈치챈 철거반원들은 스스로 포승을 풀며 “어쩔 셈이냐?”며 또다시 그를 자극했다.
그는 마지막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철거반원들에게 집을 불태운 것과 폭력을 행사한 것에 대한 사과를 요구했으나, 철거반원들은 끝까지 미안하다말하지 않았다. 철거반원들이 계속 조롱하는 것에 흥분한 그는 구덩이에 철거반원들을 거칠게몰아넣었다. 박흥숙은 “가난한 사람은 이 나라 국민이 아니란 말인가”라고 절규하며 철거반원들의 머리를 하나씩 쇠망치로 내리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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