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문화/<제국주의와 전염병>

01. 한 노예가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며 죽었다.

by BOOKCAST 2022. 7. 11.
반응형

 


 

한 노예가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며 죽었다,
수십 년 뒤 그의 죽음은 인간이 먹지 않고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로 활용됐다

아프리카 대륙 서부해안에서 출발한 배는 하루가 넘게 항해하고 있었다. 그가 들을 수 있는 소리라고는 어떤 남자가 외국어로 말하는 것뿐이었다. 파도가 선체에 부딪히고, 갑판 아래쪽에서는 고통스러운 신음이 올라오고 있었다. 배는 바람을 타고 아메리카 쪽으로 움직였다. 눈에 보이는 것은 하늘밖에 없었다.

그는 얼마 전 족장과 언쟁을 벌였다. 족장은 복수를 위해 그에게 사술을 행한다는 혐의를 씌워 온 가족을 노예로 팔아버렸고, 그의 가족은 졸지에 고향인 가나에서 신세계로 쫓겨나는 신세가 됐다. 그는 이런 자신의 운명을 거부했다. 그래서 그는 배의 선원들이 노예들에게 콩죽, 쌀, 후추 같은 먹을 것을 주러 왔을 때 음식이 담긴 국자를 쳐다보지도, 입을 벌려 먹으려 하지도 않았다. 한 선원은 그가 “살기 위해 먹어야 하는 것을 모두 거부했다”고 말했다. 어쩌다 칼을 손에 넣게 된 그는 마지막 저항의 표시로 목을 칼로 그었다. 아메리카에서 노예로 사느니 차라리 죽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의 몸에서 흐르는 피를 본 선원들은 승선 의사 토머스 트로터에게 알렸다. 의사는 “상처를 꿰매고” 붕대로 목을 감았다. 그날 밤 그는 붕대를 풀어버리고, 상처를 꿰맨 실을 모두 뽑아냈다. 그러고는 손톱으로 목의 다른 쪽에 구멍을 뚫었다. 피가 목의 상처 안으로 들어가고 밖으로도 철철 흘러내렸다.

이튿날 아침 선원들이 그를 발견했다.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선원들은 그를 갑판 위로 질질 끌어올렸다. 말을 할 수 있었던 그는 “백인들과 같이 가지 않겠다”고 외쳤다. 그러고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선원들은 그의 손을 움직이지 못하게 결박한 다음 억지로 음식을 집어넣으려고 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열흘쯤 음식을 거부하다 사망했다. 그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삶에 대한 다른 내용도 마찬가지다. 가족들이 같은 배에서 그의 자해 현장을 지켜봤을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몇십 년이 지난 1839년 로버트 던더스 톰슨(Robert Dundas Tomson)이라는 런던의 내과의사가 이 이야기를 영국의 저명한 의학 학술지 〈랜싯(Lancet)〉에 실었다. 톰슨도 이 사람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

그 배에 탔던 의사 트로터가 1790년대 영국 의회에서 열린 노예무역 관련 청문회에 나와 한 증언을 토대로 이 이야기를 쓴 것이었다. 톰슨은 이 이야기를 인간이 먹지 않고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는지 보여주는 여러 사례 중 하나로 사용했다. 톰슨은 노예무역의 잔인함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그건 그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톰슨은 노예무역의 폭력성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알고 있었지만, 이 또한 그에게는 중요치 않았다. 오로지 노예로 팔려가던 아프리카 남자가 아무것도 먹지 않고 일주일 넘게 살아남았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