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노예선에서 죽어간 수많은 노예들 덕에 위생관념에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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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선에서 죽어간 수많은 노예들 덕에
의사들은 환기의 중요성을 새삼 인식하고 위생관념에 눈을 떴다

트로터는 브룩스 호의 아프리카인 노예 관찰에 의존해 연구를 했음에도 막상 논문을 발표할 때는 서론에서 “수많은 사례”라는 표현으로 뭉뚱그렸다. 이 표현은 경험적 관찰에 의존했음을 강조함으로써 연구에 적합성을 부여하지만, “수많은 사례” 대부분이 사실 아프리카인 노예 관찰임을 숨기기 위한 방편이었다. 동료 의사들을 독자로 하는 논문을 쓰면서 트로터는 노예선 바닥의 상태가 어떻게 건강에 안 좋은 환경을 만들었는지, 자신이 그 환경을 어떻게 분석해 괴혈병의 원인, 치료법, 예방법에 대한 이론을 만들어냈는지에 대해서는 숨기는 의학용어를 사용한 것이다. 그 결과, 새로운 과학 지식의 발견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아프리카인 노예들은 의학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트로터에게 배 밑바닥의 혼잡한 환경은 신선한 공기의 필요성을 증명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새로운 연구 분야인 산소 연구에 과학적인 증거를 제공했다. 사람들로 가득 찬 환경과 신선한 공기 부족이 사망과 질병의 원인이 된다는 생각은 상식적으로 그럴듯해 보이지만, 당시 이 견해는 사실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의학철학》에서 로버트 손튼은 트로터의 노예선 상태 묘사를 “공기 공급”의 필요성을 보여주는 여러 사례 중 하나로 인용한다. 손튼은 윌슨이라는 노예상이 아메리카에서 팔기 위해 구매한 아프리카인 노예 2,064명 중 586명이 항해 도중 사망했는데, 그 원인은 노예들이 노예선에서 너무 밀집한 상태로 수송됐기 때문일 것이라고도 썼다. 그는 캘커타의 영국군 포로들 사례를 들어 이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다시 말해 감옥과 노예선, 병원과 교도소의 상태가 당시의 의사들에게 환기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는 데 도움이 됐다는 뜻이다. 노예선의 상태에 대한 트로터의 묘사는 의학철학자와 사법당국 사이의 논쟁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1790년 트로터는 국제 노예무역에 반대하는 증언을 하기 위해 하원특별위원회 위원들 앞에 섰다. 그는 브룩스 호의 갑판 아래 공기가 부족했다며 자신이 숨을 쉬기도 힘들었다고 증언했다. 그는 “노예들이 살기 위해 온갖 노력을 힘겹게 하는 것을 자주 목격했습니다. 그들의 노력은 더러운 공기를 이용해 실시하는 실험에서 죽어가는 동물들, 공기펌프를 단 채 숨이 끊어져 가는 사람들이 하는 노력과 다르지 않았습니다.”라고 증언했다. 그는 노예들이 “‘숨이 막혀 죽겠다’라는 말을 자신들의 언어로 외쳤다”고도 했다. 트로터의 증언은 노예제 폐지 운동을 지지하는 동시에 신선한 공기의 필요성에 대한 이해를 증진하기 위한 것이었다.

트로터의 괴혈병 관련 논문은 노예선에 승선한 노예들의 영양 공급과 운동 그리고 노예 수용 공간의 청결을 위한 원칙을 제시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로 마무리됐다.

“이 모든 원칙은 어떤 상황에서든 반드시 지켜져야 하며, 이 원칙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가장 관대한 수단이 사용돼야 한다. 그럴듯한 말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잔혹함이 사라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인간의 권리, 형제의 권리를 짓밟고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