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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세이/<고독한 사람들의 도시>

04. 리스본_늙은 친구 같은 도시에서

by BOOKCAST 2022. 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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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나 언덕 위의 계단에 앉아 멀리 푸르른 타호 강과 저물녘의 하늘을 바라보던 날들. 포르투갈 맥주인 사그레스(Sagres: 정말이지 최고의 맥주!) 한 병 외엔 아무것도 필요 없었던 시간. 16세기의 화려한 유산 제로니무스 수도원이나 리스본 대성당, 로마 시대 요새였던 상 조르지 성 등 리스본을 대표하는 명소들을 다 둘러보았지만, 내겐 좁고 투박하기 그지없던 골목에서의 시간이 진짜 리스본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자신들의 도시만큼이나 오래되고 지쳐 보이면서도 순수한 미소를 간직하고 있던 사람들. 유럽에서 리스본을 ‘늙은 조강지처 같은 도시’라 부른다더니, 나에겐 마치 시간을 감아 마주한 늙은 친구와도 같은 느낌이었다. 무언가 아득하면서 전혀 낯설지 않은, 포르투갈의 천재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가 『불안의 책』에서 묘사한 것처럼.

나는 결코 여기 리스본 도라도레스 거리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때때로 생각한다. 내가 그 거리를 글로 쓴다면, 그곳은 마치 영원의 세계 같은 것이리라.

바로 그것이었다. 이전에도 내가 여기에 있었고 앞으로도 벗어나지 못할 것만 같은, 영원의 세계. 리스본의 강가와 골목에서 내가 느낀 감정이 그런 것이었음을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리스본보다 더 큰 기대를 품고 찾아갔던 포르투. 리스본과 마찬가지로 언덕과 강, 골목이 있었지만 거의 모든 골목에서 낡은 건물을 리모델링 하는 공사가 한창이었고, 나는 마음 둘 거리를 쉬이 찾지 못했다. 세련된 카페와 북적이는 강가, 밤이면 축구팬들의 함성이 거리에 울려 퍼지곤 했다. 카르무 성당의 화려한 파사드와 아줄레주 벽, 세계에서 제일 아름다운 서점으로 꼽히는(늘 지독히도 북적이던) 렐루 서점, 시선 닿는 곳마다 화보였던 빌라 노바 데 가이아 거리. 포르투의 많은 것들이 명성 그대로였지만, 이상하게도 자꾸만 리스본의 골목길이 그리워지는 것이었다.

지나고 나서야 더 사랑하게 되는 것은 쓸쓸하면서도 벅찬 일이다. 나는 그곳을 떠난 뒤 비로소 리스본을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어쩌면 이미 있었던 사랑을 뒤늦게 깨달은 것인지도 모른다. 리스본의 좁은 골목들 사이로 조각조각 펼쳐진 하늘에 노을이 질 때, 좀 더 오래 언덕에 서서 생각할 걸 그랬다. 잊지 말아야 했던 숫자와 아름다웠던 약속들, 내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남아 있는 날들을. 코메르시우 광장 앞, 깊어가는 밤의 강가에 앉아 맥주 한 병 마시며 좀 더 오래 할아버지 버스커의 노래를 들어줄 걸 그랬다. 나이 든 밥 딜런 같은 가창력이었지만, 스틸기타의 삐걱대는 소리만큼은 정말 멋졌는데.

그리고 아아, 28번 트램! 굽이굽이 언덕길을 힘겹게 오르내리던 그 작고 노란 트램에 다시 올라타고 싶다. 사람들 사이에 겨우 끼어 선 채 좁디좁은 골목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며 전망대를 향해 올라가고 싶다. 전망대 벤치에 앉아 강과 하늘과 언덕 아래 도시를 굽어보고, 골목 곳곳에 숨어 있는 작은 공연장에서 파두 공연을 본 뒤 페소아의 시집을 옆에 끼고 느릿느릿 언덕을 내려오고 싶다.


생각한다는 건
바람이 세지고, 비가 더 내릴 것 같을 때
비 맞고 다니는 일처럼 번거로운 것.

내게는 야망도 욕망도 없다.
시인이 되는 건 나의 야망이 아니다.
그건 내가 홀로 있는 방식.

- 페르난두 페소아, 「양 떼를 지키는 사람」에서,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 아마데우 드 프라두가 남긴 마지막 메모지에 적혀 있던 단어는 ‘외로움’이었다. 꽃과 길과 언덕의 도시. 좁고 빛바랜 골목 골목에서 기꺼이 외로움과 동행하며 더 외로워질 날들을 생각했던, 그래도 슬프지 않았던 리스본에서의 가을. 그 속에 다시 한 번 머무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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