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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세이/<고독한 사람들의 도시>

06. 로마_달콤한 삶은 어디에 있는가?

by BOOKCAST 2022. 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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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러운 길, ‘Via Sacra’라 이름 붙여진 거리를 걸어 고대 로마의 중심지 포로 로마노에 도착했다. 뜨거운 태양 아래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한 비. 티투스의 개선문 아래에서 여우비를 피하러 모여든 몇몇 여행자들끼리 가벼운 인사를 나누었다. 여행하다 보면, 서로 눈만 마주쳐도 웃음 짓게 되고 이야기를 꺼내게 되는 특별한 경험을 자주 하게 된다. 대화를 나눌 순간, 혹은 그와 동행중인 침묵을 지켜줘야 할 순간을 구별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여행으로 터득하게 되는 값진 미덕 중의 하나일 것이다.

무성한 잡초와 고양이들, 귀퉁이만 남은 처마를 위태롭게 이고 있는 기둥, 여기저기 나뒹구는 건축물들의 잔해, 머리가 없는 조각상, 초라한 카이사르의 무덤, 폐허라기엔 여전히 압도적인 느낌을 주는 공공 광장. 찬란했던 옛 로마의 흔적들 앞에서 아득한 감흥에 빠졌다. 1,500년 영화를 누린 제국의 혼들이 떠도는 이곳.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올리브 나무 사이로 불현듯 그 시대를 넘나드는 경계가 나타날 것만 같아서, 시간과 공간의 가장자리를 주의 깊게 걸었다.

수천 년을 살 것처럼 살아가지 말라. 살아 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 선한자가 되라.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명상록 한 구절이 떠올랐다. 2,000년 전 로마인들의 숨결을 느끼며. 이 거대한 폐허 한가운데서.

베네토 거리에 있는 숙소. 영화 <달콤한 인생>의 포스터와 스틸 컷이 방안 곳곳에 장식되어 있다. 당시 사교계의 중심가였던 이 거리가 영화의 주 무대였기 때문일까. 지금도 바르베리니 궁전을 비롯해 유서 깊은 건물들과 분수를 중심에 두고 로마에서 보기 힘든 대로변이 형성되어 있다.

마지막 날 밤. 치즈와 작은 와인 병을 들고 숙소를 나와 쉴 새 없이 차들이 교차하는 바르베리니 광장의 분수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오가는 차들과 불밝힌 노천카페. 그 풍경을 바라보며 치즈 한 조각에 와인을 마시고 있노라니, 모처럼 작은 일탈이라도 벌이고 있는 기분이었다. 해 저문 로마의 하늘 아래, 오래된 건물과 가로수가 늘어선 교차로 한가운데 혼자 앉아 와인을 마시는 이방인. 아무도 나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고, 그 무심함이 너무 달콤해 노래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린 시절의 것만 제외하고 모든 정열은 스치고 지나가 저절로 꺼진다”고 체사레 파베세가 그랬었나. 어느 날 갑자기 수면제 한 통을 먹고 죽어버린 이탈리아의 작가. 여행을 떠나오기 전, 한동안 그의 책을 읽었었다. 스치고 지나가는 그 모든 정열이, 그러나 삶의 이유이기도 하다는 걸 당신은 알고 있었겠지. 꺼져 가는 그 정열을 가까스로 부여잡고 나는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삶이 곧 여행임을 알아가는 시간. 내가 인식하지 못했을 때부터 나의 삶은 시작되었고, 그리하여 나의 여행도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되었음을.

포로 로마노(Foro Romano)

1,500년 영화를 누린 제국의 혼들이 떠도는 이곳.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올리브 나무 사이로 불현듯 그 시대를 넘나드는 경계가 나타날 것만 같다.

 

달콤한 삶은 어디에도 없다. 계획과 욕망, 달콤한 순간과 고통과 시가 있을뿐. 사랑은 시의 한 형식이다. 달콤하고 고통스러운 모든 순간을 거쳐 삶의 한 형태를 완성하는 순간, 한 편의 시나 알레고리라고 할 수도 있는 그 순간, 드디어 모든 것들을 이해하게 되리니. 생의 비밀을 깨닫는 그 순간을 향해 그저 묵묵히 길을 걸을밖에. 또다시 길을 떠날밖에.

로마에서의 마지막 밤. 소란한 길가의 고독 속에 홀로 앉아 있던 밤. 죽음을 인식하고 삶을 구성하는 동안 나의 세계가 다시 시작되었다. 나는 지금 살아 있고, 언제든 그것을 끝낼 수 있다. 운명은 힘이 세지만, 내가 운명 앞에 마주 설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달콤한 삶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이 모든 수수께끼와 매혹과 어둠 속에 살아 있다는 사실, 그것이 나의 힘이자 긍지이며 당신을 사랑할 수 있는 자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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