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에세이/<고독한 사람들의 도시>

08. 베네치아_물 위의 도시에서

by BOOKCAST 2022. 3. 14.
반응형

 


 

어느 날과 그 다음날. 그 둘이 완벽하게 다른 날이 되기도 한다. 가까이 존재하던 이가 갑자기 세상에서 사라졌을 때, 나는 이전의 나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래도 삶은 계속되고, 그래서 나는, 달라진 나인 채로 여행을 떠났다.

1년 전에 숙소를 예약해 둔 곳이 두 번째 찾는 베네치아였고, 하필 찬 바람부는 가을이었고, 늦은 오후 산타 루치아 역에 도착해 어두운 호텔 방에서 불면의 밤을 보내고 나니 도시가 바닷물에 잠겨 있었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아쿠아 알타(Acqua alta)인가. 전날의 베네치아와 완전히 다른 베네치아에서, 나는 어디로 향하든 막힌 길을 돌아 오래도록 걸어야 했고, 무엇을 하든 물 위에 서 있어야만 했다. 그래도 삶이 계속되었던 것처럼, 그래도 어딘가에 길이 있었다. 이러다 보면 언젠가는 그리운 이들의 곁으로 갈 수 있을까. 산 만큼을 더 살아야 한다면, 방법이 없지 않은가. 돌고 돌 수밖에.

산마르코 광장의 카페. 종아리까지 물이 차는 야외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주문했다. 기다란 장화를 신고 커피와 음료를 나르는 가르송들. 베네치아 전통로스팅의 묵직한 커피를 마시며 물 위에 서 있는 대성당과 두칼레 궁전을 바라 보았다. 산마르코 대성당의 지하 묘지와 대리석 기둥을 걱정하는 것이, 이 순간 나의 일이다. 그것이 비록 내 가슴속의 고통 한줌 덜어주지 못할지라도, 고통은 고통이요, 생은 생인 것이다.

물에 잠긴 산마르코 대성당의 지하 묘지와 대리석 기둥을 걱정하는 것이 이 순간 나의 일이다. 그것이 비록 내 가슴속의 고통 한줌 덜어주지 못할지라도 고통은 고통이요, 생은 생인 것이다.
 

집과 가게에 들이친 바닷물을 퍼내고 있는 사람들의 아픔과 새로운 경험에 들뜬 여행자들의 활기가 교차하는 풍경. 물장난치는 아이는 행복해 보였고, 여기저기서 기념사진을 찍는 이들의 표정 역시 즐겁기 그지없었고, 주민들은 골목 골목에서 묵묵히 자기의 일을 했다. TV에선 50여 년 만의 최악의 침수 사태라는 뉴스가 연이어 나오고 있었다. 1년 전에 계획한 여행에서, 도착한 지 단 하루 만에 역사적인 재난의 현장을 마주하다니.

유디트 헤르만의 단편소설 「아쿠아 알타」의 구절처럼, 나는 여기 베네치아에서 “미로 같은 골목길을 헤매다 사라질” 수도 있고, “땅속으로 꺼지거나 물이 나를 삼킬” 수도 있다. “위험하지 않다면 그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베네치아도, 여행도, 삶도, 그렇게 위험하고 그래서 의미가 있다 한다. 그 말을 한 번 믿어볼까. 늘 조금은 위태로웠던 삶. 거듭되는 위험 속에서 나는 소중했던 많은 것을 잃었다. 들이친 바닷물은 언젠가 마르겠지만, 파괴된 자리는 결코 처음으로 되돌릴 수 없다. 파괴된 채로, 혹은 가까스로 복원된 채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실리콘을 넣은 고대 신전의 기둥처럼 슬픈 일이지만, 그래도 살아갈밖에. 고통 없는 삶이 어디에도 없으니, 이 평범한 생을 받아들일밖에.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