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서든 벤치에 앉아 상념에 잠길 때면 나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몇 가지 장면이 있다. 하나는 스페인 영화 <아만테스>. 매혹적인 미망인에게 빠져 자기만을 바라보는 여인을 죽일 마음을 품게 되는 남자. 오래된 연인이 앉은 벤치 아래로 하나둘 떨어지는 핏방울. 붉게 번져가던 치명적인 욕망의 끝.
다음으로 고독하기 이를 데 없는 대만 영화 <애정만세>. 그 마지막처럼 벤치에 앉아 울었던 적이 있다. 그들도 나도 언제나 홀로 남겨지던 삶.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장면. 눈 내리는 공원 벤치에 앉아 ‘마치 대단한 밤이 다가오는 것처럼’ 하품을 하고 또 하는 남자.
“그래, 돌아갈 시간이야. 안 그러면 문이 닫힐 거야.”
천천히 밤이 오고, 그는 그 자리에서 눈사람이 되어 죽음을 맞는다. 외덴 폰호르바트의 소설 『우리 시대의 아이』는 지금 이 시대에 조금은 지루한 메시지가 되었을지라도 나에겐 여전히 떠올릴 때마다 한없이 슬픈 작품이다.
나는 군인이다. 그리고 나는 군인인 게 좋다. 이제는 내가 어디에 속하는지 알기 때문이다. 모든 게 확고하다. 마침내 질서가 잡혔다. 일상의 걱정들아, 안녕.
국가와 전쟁의 대의명분 아래 악의 본성을 키워간 그들. 전망 없이 흔들리는 청춘에게, 규율이란 포장 속의 증오와 폭력은 얼마나 매혹적인가. 죄책감도 없이 그가 죽인 이들. 깨닫지 못했으나 그가 사랑한 이들. 간결하고 단순하기 그지없는 호르바트의 문장들 사이에서 나는 지금도 종종 호흡을 멈추고 뜻 모를 서러움을 느낄 때가 있다.
전장에서 살인을 서슴지 않던 주인공은 결국 부상으로 군대를 떠나 가난한 생활로 다시 돌아가고, 그토록 충성을 다했던 국가와 사회의 비합리성을 서서히 깨달아 간다.
그렇다고 날 욕하지는 마. 나는 어쩔 도리가 없었어. 나는 바로 우리 시대의 아이였거든. 부디 이 점만은 알아주기를….
순백의 눈에 갇힌 그의 영혼은, 그의 죄는, 구원받았을까?
헝가리계의 나치 망명객으로 세계 각처를 전전하며 글을 쓰던 작가 호르바트는 파리에 머물던 중 바로 이 샹젤리제 거리에서 폭풍에 쓰러진 나무에 맞아 사망했다. 그때 그의 나이, 서른여섯. 그는 어떤 체계적인 이론이나 학파도 만들지 못했고, 그럴 시간도 없이 요절했고, 브레히트처럼 명확한 사상적 입장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여 상당 기간 소홀히 다루어졌고, 일순간 유행이자 신화로 조명되었으며, 대체로 오해받았다. 그의 칼은 브레히트만큼 날카롭지 않았고, 그의 유머는 타보리만큼 노련하지 못했다. 축제는 망쳐지고, 인간관계는 어긋나고, 의사소통은 실패한다. 과격한 언어와 냉담한 태도 사이에서 낙차 큰 꽃가루를 뿌리며 만개하려다 말아버린 예술.
그의 문우였던 추크마이어의 표현을 빌려 “미처 실현되지 못한 긍정적 능력”을 가진 작가. 좋은 말로 ‘실현되지 못한 능력’이요, 나쁜 말로 ‘경솔하며 지적 품위가 부족한’ 것으로 종종 매도되곤 했던 호르바트. 그는 말과 생각 사이의 불일치를 이야기하지만, 사회의 폭력과 소시민의 악마성을 이야기하지만, ‘정말 쉬운 언어로’ 이야기한다. 어쩌면 문제는 그것이었을 것이다.
고향도, 가족도, 운도 없었던 사람. 이 거리 어느 나무 아래에서 호르바트가 고단한 망명객의 삶을 마감했겠지. 같은 시기에 역시 이곳에서 발터 벤야민이 광고지 여백에 글을 쓰는 궁핍한 생활을 견디며 자본주의를 연구하고 있었다. 그 몇 년 전에는 『동물농장』의 조지 오웰이 호텔 식당에서 접시를 닦고 있었고.
파리는 예술가들의 도시이자 망명객들의 도시다. 뿌리 없이 떠도는 이들을 품어주는 도시. 혼란스럽고, 지저분하고, 다들 조금씩 미쳐 있지만, 그토록 많은 이들이 파리에 모여들었던 이유를 알 것 같다. “파리에서 런던으로 왔더니 너무나 정갈하고 지루하다”던 조지 오웰의 말을 알아듣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이 도시에 익숙해져 가고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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