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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사양>

04. 그건 단순한 병이 아니야

by BOOKCAST 2022. 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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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 무렵, 아랫마을 의사 선생님께서 다시 오셨다. 지난 번처럼 하카마 차림은 아니었지만, 흰 버선만은 여전히 신고 있었다.
 
입원하는 게…….”
내가 여쭈자,

아니, 그럴 것까진 없습니다. 오늘은 센 주사를 놓아드릴테니 열도 곧 내릴 겁니다.” 하고 여전히 미덥잖은 대답을 하며, 소위 그 센 주사를 놓고 가셨다.
 
하지만 그 센 주사가 효험이 있었던지, 그날 정오가 지나자 어머니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며 땀이 비 오듯 흘렀다. 젖은 잠옷을 갈아입으시던 어머니가 웃으며 말씀하셨다.
명의인가 보다.”
 
열은 37도로 내려가 있었다. 나는 기뻐서 이 마을에 하나 뿐인 객점으로 달려가 주인아주머니께 부탁해 달걀 열 개를 얻어 바로 어머니께 반숙을 해드렸다. 어머니는 반숙 세개와 죽 반 그릇을 드셨다.
 
이튿날, 그 명의가 또다시 흰 버선을 신고 찾아와, 내가 어제 그 센 주사의 효험에 대해 감사 인사를 드리자, 선생님은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는, 정성스레 진찰하시더니 내 쪽을 돌아보며 말씀하셨다.
사모님은 이제 다 나으셨습니다. 그러니 이젠 무얼 드셔도, 무얼 하셔도 좋습니다.”
 
역시 미심쩍은 말투여서 나는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참아냈다.
 
선생님을 현관까지 배웅해드리고 방으로 돌아와 보니,
어머니가 마루 위에 앉아 계셨다.
정말 명의구나, 이제 다 나았어.”
한껏 즐거운 표정으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셨다.
 
어머니, 장지문 좀 열까요? 밖에 눈 와요.”
 
꽃잎처럼 탐스러운 눈이 하늘하늘 내리고 있었다. 나는 장지문을 열어 어머니와 나란히 앉아, 유리문 너머 이즈의 눈을 바라보았다.
 
이제 다 나았어.”
어머니는 또다시 혼잣말처럼 되뇌었다.
 
이렇게 앉아 있으니, 지난 일이 다 꿈만 같구나. 실은 나, 막상 이즈로 이사하려고 하니 아무래도 싫지 뭐니. 니시카 타초에 있는 그 집에서 하루, 아니 딱 반나절만이라도 더 머물고 싶었어.

 

 

기차에 올랐을 땐 반쯤 넋이 나가버렸지. 여기 도착했을 때도 처음엔 좀 즐겁다가, 어둑어둑해지니까 도쿄가 그리워서 심장이 타들어 가는 것 같고 정신이 아득했 단다. 그건 단순한 병이 아니야, 신이 나를 한 번 죽이신 다음, 어제까지와는 다른 나로, 다시 살게 하신 거야.”
 
그 후로 지금까지, 우리 둘만의 산장 생활은 아무 일 없이 평온하게 이어졌다. 마을 사람들도 우리에게 친절했다. 이곳으로 이사 온 때가 작년 12, 그리고 1, 2, 3, 4월 오늘까지, 우리는 식사를 준비할 때 빼고는, 대개 툇마루에서 뜨개질을 하거나 응접실에서 책을 읽고 차를 마시며, 세상과 단절되다시피 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2월에는 매화가 피어 마을이 온통 꽃으로 뒤덮였다. 3월에도 바람 없고 포근한 날이 많아, 활짝 핀 매화도 시들지 않고 3월 말까지 찬란하게 피어 있었다. 아침에도 점심에도 저녁에도 밤에도, 매화는 한숨이 새어 나올 정도로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그리고 툇마루의 유리문을 열면, 언제나 꽃향기가 훅 흘러들었다. 3월의 끝자락, 해 질 녘에는 어김없이 바람이 불어와, 해 저무는 식당에서 차를 준비하고 있노라면, 창문으로 매화 꽃잎이 날아들어 찻잔 속에 젖어 들었다.
 
4월에 접어들면서, 나와 어머니가 툇마루에서 뜨개질을 하며 나눈 대화의 주제는 밭농사 계획에 관한 것이었다. 어머니도 돕고 싶다고 하셨다. 아아, 이렇게 쓰고 보니, 언젠가 어머니가 말씀하신 것처럼, 어쩌면 우린 한 번 죽었다가 되살아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 같은 건 결국 인간에겐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어머니는 말씀은 그렇게 하셨어도, 여전히 수프를 한술 드시다가 나오지 생각에  하신다. 그리고 내 과거의 상처도, 실은 조금도 아물지 않았다.
 
아아, 어느 것 하나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쓰고 싶다. 나는 내심 이 산장의 평온이 죄다 가짜에 허울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때도 있다. 이것이 우리 모녀가 신으로부터 받은 짧은 휴식 기간이라 해도, 이미 이 평화에는 무언가 불길하고 어두운 그림자가 스멀스멀 다가오는 기분이 들었다. 어머니는 행복을 가장하셨지만 나날이 쇠약해져 갔고, 또 내 가슴속에서 똬리를 튼 살무사는 어머니를 희생시키면서까지 살이 올랐는데, 아무리 억누르고 억눌러도 살이 올랐다. 아아, 이게 단지 계절 탓이라면 좋으련만, 내게는 요즘 이런 생활이 못내 견딜 수가 없다. 뱀 알을 태우는 몹쓸 짓을 한 것도, 그런 나의 초조함에서 비롯된 게 틀림없다. 그저 어머니를 더욱 슬프고 쇠약하게 만들 뿐이다.
 
사랑, 이라고 쓰고 나니, 그다음은 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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